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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Dec 08. 2016

결점이 매력이 될 때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

이른 아침 다섯 시 맨해튼. 한적한 거리에 멈춰 선 택시에서 여인이 내린다. 지방시의 우아한 블랙 드레스를 걸친 채 커피와 빵이 든 봉지를 들고. 쇼윈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길 때 영화사에 영원히 기억될 오프닝이 태어났다. 여성의 매혹과 로망이 깃든 멜로디 하나를 품고서. 블레이크 에드워즈Blake Edwards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그리고 감독의 영원한 단짝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의 'Moon River'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인상은 두괄식에 가깝다. 영화나 음악이나. 오프닝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뭉클한 빗속의 엔딩이 기억에 가물거리듯, '문리버' 뒤로 이어지던 넋두리 같은 노랫말들이 생각나지 않아 콧노래로 흥얼거리기 일쑤니. 그러나 그보다 더 희미해진 기억은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i의 소설과 퍽 다른 결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소설에 할리는 있었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 폴 바잭은 없었고, 대신 할리를 지켜보는 화자인 '나'는 커밍아웃한 작가가 가공해낸 또 다른 자아였던 동성애자 남창이었으니까. 이쯤 되면 카포티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처음 원고를 받아 본 출판사가 인쇄를 거절했던 이유를 짐작할만하다. 하지만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제작자는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책을 재미있게 읽은 프로듀서는 할리라는 결점 많은 캐릭터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카포티의 이야기에서 위험과 잠재력을 동시에 봤기 때문이다. 작가를 집요하게 설득해 영화화하는데 필요한 판권을 결국 손에 넣은 그는 영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남자 주인공을 비교적 점잖은(!) 제비족으로 바꾸고, 거기에 <7년만의 외출>을 썼던 시나리오 작가를 붙여 로맨틱 코미디의 향기를 더했다. 창가에 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할리의 모습 역시 원작엔 없었다. 비록 작은 묘사에 불과했음에도 이 영화에서 음악의 시작점이자 열쇠는 거기에 있었다. 


카포티가 판권을 양도하면서 주인공으로 고집했던 마릴린 먼로 대신 오드리 햅번이, 예리한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존 프랑켄하이머 대신 블레이크 에드워즈가 감독으로 낙점되면서 그와 콤비를 이루던 헨리 맨시니가 자연스레 음악 담당으로 물망에 오른다. 허나 제작자는 유명한 브로드웨이의 작곡가에게 영화음악을 맡기고 싶어 했다. 맨시니의 가벼운 라틴 팝 스타일은 영화의 무대인 뉴욕에 어울리는 사운드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할리를 위한 노래가 먼저 필요했기에, 맨시니는 자신의 곡이 사용되리라는 아무런 보장 없이 작곡에 들어갔다. 오드리 햅번이 직접 노래해야 한다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서.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 나오는 뮤지컬 <파리의 연인Funny Face>이 작곡가의 눈에 들어온다. 프레드 아스테어와 호흡을 맞춰 노래하는 햅번의 모습이. 그녀가 영화 속에서 불렀던 곡을 피아노로 쳐본 맨시니는 한 옥타브를 겨우 넘기고, 멜로디가 단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작곡의 실마리를 찾았음에도 한 달이 넘도록 곡을 쓰지 못한다. 쉽고 단순한 멜로디가 오히려 작곡하기엔 까다로운 결점이었던 셈이다. 울적한 마음에 저녁 늦게 피아노 앞에 앉아 고민하던 맨시니에게 희미한 멜로디가 떠올랐고, 불현듯 탄력을 받은 작곡가는 30분 만에 곡을 써내려갔다. 오직 하얀 건반만이 필요한 다장조에, 한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심플하고도 서정적인 선율을. 그리고 오랜 친구인 조니 머서Johnny Mercer에게 노랫말을 부탁한다. 며칠 후 머서는 세 가지 가사를 내밀었고, 그중 하나에 'Blue River'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같은 제목의 노래가 이미 몇 개나 있다는 작곡가의 핀잔에 'Moon River'로 슬쩍 가사를 바꾸자 두 사람 모두 흡족해했다. 특히 맨시니는 곡 말미에 등장하는 'Huckleberry Friend'라는 구절이 왠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과 비슷하게 들렸고, 그것이 미시시피 강을 연상시켜 한결 마음에 들었다. 룰라 메이에서 할리 골라이틀리로 이름을 바꾼 시골 처녀의 인생 역정이 교교한 달빛 아래 흐르는 강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완성된 곡이 헨리 맨시니를 반대했던 영화 제작자의 마음마저 돌려놓았음은 물론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Intrada(2013)


<티파니에서 아침을>에는 'Moon River'가 여덟 번 나온다. 애초 짤막한 삽입곡으로 만들어졌지만, 멜로디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해 영화의 메인 테마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오프닝과 오드리 햅번이 부르는 노래가 우리에겐 가장 친숙한 버전인데, 팔색조 같은 할리의 매력이 여덟 가지로 편곡되어 영화 전편에 두루 흐른다. 흥미로운 것은 우아한 관현악, 감미로운 코러스 혹은 햅번의 담백한 보컬로 기억되는 이 멜로디의 진심을 헨리 맨시니는 하모니카에 담았다는 것. 그것도 첫 장면부터. 화려한 보석가게 앞에 선 차도녀가 실은 텍사스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 출신임을 귀띔하듯이. 그리고 왈츠의 화사한 리듬에 상류 사회를 향한 그녀의 꿈을 실어내듯이. 'Moon River'의 단순한 멜로디엔 여인의 기억과 희망이 그렇게 교차한다. 위층으로 이사 온 폴을 남동생의 이름으로 그녀가 제멋대로 부를 때 배경음악으로 깔린 'Poor Fred'에도 추억을 소환하는 아련한 하모니카 음색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한층 느리고 어둡게. 할리에게 과거는 그립지만 그토록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을까.


할리의 테마곡인 'Latin Golightly'와 짝을 이루는 차차 버전의 'Moon River'는 헨리 맨시니의 명성에 걸맞은 라틴 재즈 스타일이 맛깔스럽다. 남국의 뜨거운 리듬 속에서 방탕하고 속물스러운 또 다른 할리의 얼굴이 한 꺼풀 벗겨진다. 오직 남자의 경제력이 전부라고 믿는 그녀의 연애관이. 흥청거리긴 해도 음란하지 않은 경쾌한 리듬감이 카포티의 소설보다 한층 밝아진 영화의 톤과 제법 잘 어울린다. 가식과 허영으로 똘똘 뭉친 할리의 수수한 민낯을 마주할 때도 'Moon River'다. 오로지 기타에 의지해 노래하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이웃집 남자는 당돌하고 억척스러운 표정에 가려져 있던 고독을 본다. 아마 그때부터일 것이다. 호기심 어린 폴의 눈빛이 할리를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뀐 순간은. 그리고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부르는 전남편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은 폴로 하여금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한다. 'An Exceptional Person'에서 'You're So Skinny'와 'Turkey Eggs'로 이어지는 메인 테마의 낯익은 선율이 하모니카에서 쓸쓸한 현악으로, 칠면조 알을 훔치던 배고픈 소녀의 기억을 아로새긴 단조의 멜로디로 되살아나 남자의 마음을 흔든다. 결점이 장점이 될 리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허물은 이제 폴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꿈결 같은 'Moon River'의 뒤를 묵묵히 떠받치는 드라마틱한 스코어도 솔깃하다. 반세기 가까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 영화음악들은 1961년 RCA 레이블을 통해 나온 앨범에는 자취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60년대 초반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모노로 녹음했기에 사운드의 퀄리티가 좋지 않았던 것.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후 맨시니는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재녹음했고, 음반사는 앨범 제작의 콘셉트를 영화음악이 아니라 이지리스닝에 맞춘다. 자연 흥겹고 듣기 좋은 곡 위주로 선곡됐고, 그마저도 재녹음을 위해 다시 한번 편곡이 이루어졌다. 비록 이 앨범으로 아카데미에 이어 그래미상까지 휩쓸긴 했지만, 영화에서 흘러나왔던 바로 그 음악은 아니었던 것이다. 관객을 매료시킨 오드리 햅번의 담백한 노래가 전 세계에 발매된 RCA 앨범에서 슬그머니 빠진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사가 음악을 그에게 맡기자 고마운 나머지 저작권을 파라마운트에게 넘겨준 맨시니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미덕인 오리지널리티를 포기해야 했고, 대신 재녹음한 앨범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진짜 영화음악은 영화를 통해 듣고, 음악의 여운은 (재녹음한) 앨범을 통해 간직해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숨을 거두기 전 그가 쓴 자서전에는 영화에 흐르던 곡들을 다시 들어보고 싶다는 늦은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잠에 취한 할리와 이삿짐을 나르는 폴의 첫 만남을 기타와 비브라폰의 사운드로 나른하게 그려낸 Paul Meets Cat', 돈 많은 부자와 연애를 꿈꾸다 매번 실패하는 할리의 푸념이 로맨틱한 재즈 선율에 담긴 'Rats And Super Rats', 그리고 맨시니의 걸작 중 하나가 될 <핑크 팬더>의 미스터리한 리듬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케 하는 'The Big Heist'는 감상하기 어려운 영화음악의 결점이 아니라 영화에 생기와 윤기를 더하는 음악의 매력일 것이다. 그것은 대미를 장식하는 'Where's The Cat? And End Title'도 마찬가지다. 마피아와의 스캔들에 휘말린 할리가 브라질에 가겠다고 고집 피울 때, 폴은 그녀가 버린 고양이를 찾아 나서며 이별을 고한다. 차디찬 충고와 함께.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할리의 무거운 속내를 대신해 날카로운 선율이 가슴에 꽂힌다. 비를 맞으며 고양이를 찾는 두 사람. 빗속의 연인이 입을 맞추는 순간 'Moon River'의 멜로디가 희미하게 울려퍼진다. 헨리 맨시니가 단지 듣기 좋은 음악만을 선보이고 싶었다면, 이 행복한 엔딩에 불협화음이나 다름없는 스코어 대신 달콤한 노래를 처음부터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현명한 영화음악가였다. '음악이 좋은 영화'가 아니라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작곡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맨시니의 그런 태도가 자칫 단조로워 보이는 영화음악의 결점을 매력으로 바꾼 좋은 본보기다.




01 [03:07] Main Title(Moon River)

02 [01:24] Paul Meets Cat  

03 [04:57] Sally's Tomato

04 [01:05] The Big Blowout

05 [03:22] Poor Fred

06 [02:32] Moon River(Cha Cha)

07 [03:05] Latin Golightly

08 [04:48] Something For Cat

09 [03:22] Loose Caboose - Part 1

10 [02:11] Loose Caboose - Part 2

11 [02:03] Moon River_ Audrey Hepburn

12 [01:37] Meet The Doc

13 [02:57] An Exceptional Person

14 [00:57] You're So Skinny

15 [02:43] Turkey Eggs

16 [02:19] Hub Caps And Tail Lights

17 [02:27] Rats And Super Rats

18 [00:55] The Hard Way

19 [00:26] Rusty Trawler

20 [01:56] Holly

21 [01:33] A Lovely Place

22 [00:22] Bermuda Nights

23 [04:02] The Big Heist

24 [01:14] After The Ball

25 [01:41] Just Like Holly

26 [00:44] Wait A Minute

27 [01:14] Feathers

28 [01:39] Let's Eat

29 [03:50] Where's The Cat? And End Title 


THE EXTRAS

30 [01:38] Moon River(Audrey Hepburn & Guitar)

31 [01:38] Moon River(Piano And Guitar)

32 [01:36] Moon River(Harmonica And Guitar)

33 [01:37] Meet The Doc(Without Organ Grinder)

34 [01:38] Piano Practice No.1

35 [01:48] Piano Practice No.2

36 [00:54] Piano Practice No.3

37 [02:01] Moon River(New York Version)

38 [00:10] Moon River(Whist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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