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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김민정 Nov 28. 2019

쉘 위 오름?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⑬

버스 타는 걸 좋아한다. 목적지도 없고 정해진 시간도 없는 채로 버스 타고 어디론가 흘러다니는 게 내 소소한 취미인데, 몇 시까지 어디에 가기 위한 이동수단으로서의 버스도 웬만큼 즐기는 편이다. 차 없이 제주에 사는 일은 여러 가지로 불편이 따르지만 번번이 살까 하다가도 마음을 접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버스를 타고 다랑쉬오름에 다녀왔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11번 버스를 타고 대천환승정류장에 내려 810번 버스를 이용하는 동선. 전에도 쓴 적 있는데 나는 이 800번대 노란색 관광지순환버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이런 오름들을 끼고 달리는 버스라니, 세상에 이런 버스가 또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버스에는 친절한 해설사 아주머니도 있다. 억새가 만발한 늦가을 풍경을 즐기느라 꾸물대는 바람에 다랑쉬오름으로 향할 즈음엔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행선지를 말하니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긴 해가 빨리 떨어지니 좀 서둘러야 될 것 같아요.” 늦어도 5시 전 차는 타야 한다며 시각표도 단단히 일러주었다.     


당부하신 시각을 머릿속에 새겨넣고 다랑쉬오름으로 출발했다. 정류장에서 다랑쉬오름 탐방로 입구까지는 800미터가량 걸어야 한다. 왕복 1.6킬로미터 도보 코스를 포함한 예상 소요 시간은 2시간 반, 내게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발길을 재촉해보지만 여간해서 속도가 나질 않았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저만치에 또렷해 자꾸만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탓이다.     


겨우 탐방로에 들어서고도 거북이 등반은 계속되었다. 숨이 차올라서가 아니라, 돌아서서 바라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 엄마와 올랐던 아끈다랑쉬오름은 마치 원반 같이 내려앉아 있었고 조금 더 오르니 아까는 보일 듯 말 듯 했던 용눈이오름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라서는 구름 위로 빼곡 나온 한라산 꼭대기가 아스라이 보였다.      


팔랑팔랑 자리를 옮겨 다니며 온갖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자 오름깨나 올라본 듯한 포스의 아저씨 한 분이 “땀 흘릴 만하죠?” 했다. “그러네요, 왜 오름의 여왕인지 알 것 같네요.” 이미 시간이 한주먹 흘러버려 능선 따라 한 바퀴는 아무래도 포기해야 했다. 다만 쉼터에 걸터앉아 광활한 분화구를 오도카니 쳐다보았다. 공백을 쓸고 가는 바람 소리가 휘휘 들렸다.    

 

어떤 하나의 도시를 주제로 여러 감독들이 각각 이야기를 만들어 붙인 옴니버스 영화들이 있다. <도쿄>나 <뉴욕 스토리>, <사랑해 파리> 같은 작품들. 문득 제주의 오름을 소재로 한다면 어떤 작품이 그려질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한 편당 너무 길지는 않게, 3분에서 5분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음미하기에도, 여운이 남기에도 충분한 러닝 타임.      


일단 스크린 전체가 초록빛으로 물들겠지. 어디선가 불어와 어디론가 불어가는 바람이 담길 테고 그 위로 색색이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덧입혀질 거야. 만약 그곳이 아부오름이라면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며 삼나무가 심긴 분화구를 비출 테고 이곳 다랑쉬오름이라면 내 눈앞의 달 모양 봉우리로 화면이 전환되겠지. 그리고 마지막엔, 역시 사람이 있어야겠다.      


사람에 따라 장르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멜로, 드라마, 다큐멘터리, 산악 영화…그것을 결정하는 요소는 결국 인물일 테니까. 정상에는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와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 온몸을 무장한 채 조깅하는 사람, 그리고 어서 내려가 버스를 잡아타야 하지만 겉으로는 여유만만한 내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지만 다른 장르로 존재하고 있었다.     


장르는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일 뿐 시비의 영역이 아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싫어!’ 조금만 달라도 ‘이상해!’ 가시 돋힌 채 뾰족뾰족했던 내가 다랑쉬오름 분화구처럼 부드럽게 둥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 안에서 우리는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근처도 가본 적 없는 영화감독 흉내를 내어보다 이런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생각들을 줍는 재미에 하릴 없이 버스를 타고 흘러다니는 걸 좋아하는가 보다. 더욱이 목적지가 오름이라면 보시다시피 꽤 쓸모있는 하루가 된다. 좋은 건 나눠야 하는 법. 쉘 위 오름?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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