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⑫
때로는 한 사람이 그곳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별생각 없던 곳도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의 친절로 인해 따스하게 기억될 수 있고 반대로 부푼 기대를 안고 찾은 곳일지라도 단 한 사람의 무례로 인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될 수 있다.
외국의 O 도시를 여행할 때 일이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는 중이었는데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제자리였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침 길 가는 사람이 있어 물었다. “OO 행 버스는 어디에서 탈 수 있나요?”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그냥 방향만 일러줘도 될 텐데, 온 길을 되돌아 동행한 후 내가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서야 그는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는 듯 인사를 건네고 총총 사라졌다. 친절의 바통은 계속 이어져, 기사는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여기서 하차하라 알려주었고 그 도시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사람들을 5명 이상 만났다. 거기서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갔는가는 아슴푸레하지만, O 도시를 떠올리면 폭신폭신한 마음이 든다.
반면 M 도시에서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셋이서 하는 여행에서 나는 총무를 맡았고 막 버스에 올랐을 때였다. 미리 챙긴 정보에 따라 동전을 준비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금을 확인하는 나에게 기사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뜸 “아무렇게나 내고 빨리 타라”고 언성을 높였다. 하도 큰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승객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로 꽂혔다. 어찌나 무안하던지. 속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규정상 정차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그날따라 차가 엄청나게 막혔다든지, 내가 타기 전에 나같이 뭣 모르는 관광객이 많았다든지, 그냥 컨디션이 별로였든지 그만한 형편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TV에서 우연히 M 도시를 보게 되면 그날 그 버스 장면부터 떠오른다.
관광지에 살다 보니 관광객을 마주치는 일이 잦다. 어쩌다 상대가 멈칫해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기라도 하면 나는 은근히 긴장하며 살짝 걸음을 늦춘다. ‘메이 아이 헬프 유?’하고 살갑게 다가갈 성격은 못되지만 내게 물어오면 상냥하게 답해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친다면 함께 가줄 용의도 있다. 제주도에 좋은 인상을 느끼면 좋겠지만(그건 이 글을 쓰다가 얹게 된 생각이고!)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다. O 도시에서 현지인들의 호의 덕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한 밤, 잠자리에서 스스로 약속을 했더랬다. 마음의 빚을 반드시 갚겠다고, 그들에게 직접 돌려줄 수는야 없겠지만 내가 사는 지역을 찾은 여행자가 도움을 청해오면 나 역시 친절을 베풀겠다고 말이다.
며칠 전 가파도에 다녀왔다. 태풍으로 인해 예정된 꽃 축제가 취소됐다지만 월요일 오후인데도 배가 2/3가량 찰 만큼 방문객이 많았다. 하지만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적었고 게다가 유일한 서양인이었으므로 그 남자, 단연 눈에 띄었다. 나는 동선일랑 무시하고 해안도로를 걷다가 마음이 동하면 골목을 헤집으며 팔랑팔랑 다녔는데 무시로 그와 부딪혔다. 그도 날 알아봤는지 두 번째엔 눈인사를, 세 번째엔 하이파이브를, 네 번째엔 짧은 대화를 나눴다. 네 번째 만남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한 어르신과 얘기 중이었는데 절반은 웃음으로 눙치는 거로 보아 말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돌아선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 쪽을 힐끔 눈짓하며 엄지를 세웠다. “뷰티풀 워먼, 뷰티풀 아일랜드!”
뷰티풀 워먼이 먼저다. 뷰티풀 아일랜드는 그다음이다. 뷰티풀 아일랜드에 뷰티풀 워먼이 한몫했음이다. 그 할머니는 아셨을까? 당신이 여행자의 마음에 꽃 한 송이 심으셨다는 것을. 태풍 피해로 온 밭이 몽땅 일그러졌을망정 자신 덕분에 여행자 기억 속 가파도는 꽃향기 나는 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물론, 정말 그럴까- 하는 건 여행자와 할머니만이 아는 일일 테지만, 어디까지나 짐작만 할 따름이지만, 나는 믿는다. 때로 ‘사람’은 여행지의 잔상을 완전히 뒤바꿔놓기도 한다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나 위대한 것이다.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