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 & talk ⑪
노트북이 고장 났다. 원고를 다 쓰고 종료 버튼을 눌렀는데 돌연 이상징후가 느껴졌다. 잠깐의 오류려니, 요 며칠 일을 좀 많이 하긴 했지, 녀석 한숨 자고 일어나, 그런 생각이었는데- 다음 날 완전히 코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곧장 부둥켜안아 서비스센터로 달려갔다. 하드에 문제가 생겼는데 자료를 복구할 가능성이 50%, 완전히 잃을 가능성이 50%랬다. 오십 퍼센트의 확률에 희망을 걸어두고 새 하드로 교체해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초기화된 화면을 보고 있자니 아, 망연해지는 거다. 몇 달 전 일이다.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에 이번에는 휴대폰이, (이제 와 생각해보면 깜빡깜빡 제멋대로 꺼졌다 켜지는 게 조짐이었다만-) 영 움직임이 굼뜨더니 급기야 자료를 꿀꺽 삼켜버렸다. 4년 됐으니 쓸 만큼 썼다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사고를 저지를 줄이야. 자고 일어나 보니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다운로드 받아둔 파일들은 물론이거니와 갤러리 속 사진들도 싹 사라져버린 것. 황당하다 못해 믿을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껐다 켰다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아, 님은 갔습니다.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트북의 사망과 휴대폰의 파업. 나는 마감 앞둔 원고들을 새로 써야 했고, 녹취록이 날아가 버려 어떤 글은 쓸 일이 막막했다. 하지만 백 번 아니 천 번 양보해서 수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또, 막상 쓰기 시작하니 인터뷰의 질문과 답변 내용이 꼬리 물며 떠올라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발휘되는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더욱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더라. 당시엔 ‘멘붕’이었지만 지금은 아찔한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다. 과거의 일상, 과거의 시간이다.
키우던 식물이 죽으면 단지 화분이 아니라 내가 들인 시간과 정성도 함께 죽어 속상한 거라던데, 딱 그런 마음이었다. 예고 없이 사진이 사라지자 꼬박 내 4년의 세월이 휘발된 기분이었다. 괜찮아졌다가도 어느 한 시점을 회상하면 남겨둔 기록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콕콕 아팠다. 게다가 그런 순간은 말짱하게 지내다가도 불쑥불쑥 찾아왔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떤 일은, 기록이 없이는 소상히 기억하지 못하더란 것이다. 분명 내가 만났고 내 눈으로 보았으며 내 귀로 들었을 텐데 아슴아슴하니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때 거기에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존재한다는 건 의식적으로 깨어있음인데, 세포 하나하나로 느끼기엔 그만 여유가 없어서, 찰칵 셔터 한 번 누르는 걸로 ‘좋음’을 간직해버린 걸지도 몰랐다. 나중에 꺼내보며 좋아하려고. 그건 비눗방울이 예뻐서, 아이스크림이 맛있어서 주머니에 넣어두는 일과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비눗방울이 허무하게 터지고서야, 아이스크림이 주르륵 녹아 흐르고 나서야, 간직하고 싶은 장면일수록 촉수를 세우고 생생하게 존재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휴가철이 되면 여행 관련 업체나 매체들이 트렌드를 발표하곤 한다. 올여름 신조어 가운데는 ‘인스타그래머블’이었다. ‘인스타그램(Instagram)’과 ‘할 수 있는(-able)’의 합성어로 그대로 해석하면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이란 뜻이다. SNS로 공유할 수 있을 만큼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사진을 남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요즘 추세란 얘기다. 인생샷, 물론 중요하다. 나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진 코너를 통해 매주 ‘인생샷 찍는 팁’을 전하고 있다. 다만, 카메라가 기록하기 전에 나의 감각기관에 저장하는 게 먼저라는 걸 나누고 싶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은 교훈이니, 제주 여행자여! 부디 새겨 들어주시길. 자, 다 같이 외쳐보아요. 셔터 누르기 전에, 내 마음 속에 저장!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