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20)
약 처방하듯 책을 처방하는 책방이 있다.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주는 앱도 있고(심지어 여러 개!), 북컨시어지 서비스를 운영하는 서점도 있다. 기왕 같은 시간 들일 거라면 커스터마이징 된 책을 읽겠다는 독자가 많다는 얘기다. 독서에도 합리와 효율의 가치가 적용되는 것일까?
장 보러 가면 필요한 물건인지 ‘묻고 물어 일백 번 고쳐 물어’ 사는 나지만, 그 물건이 책이라면 예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가 된다. 흡족한 책을 만나면 기쁘고, 별로인 책에선 배운다. 그래서 책은 즉흥적으로 고르는 편이다. 간혹 계획적인 경우는 이런 때. 좋은 책이 또 좋은 책을 소개할 때. 자칭 ‘꼬리물기 독서법’이다.
오가와 이토가 쓴 <츠바키 문구점>은 번역가 권남희 씨의 신간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의 꼬리를 문 책이었다. 문구점을 하며 대필 일을 하는 20대 후반 여성 포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연이 이어진다. 아내의 새로운 사랑을 위해 이혼을 결심한 남편이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절세가인이지만 유달리 악필이라 구박받는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전하는 편지 등이 손글씨 그대로 수록돼 있어 몰입도를 높여준다. 그렇다고 독후감을 쓰려는 건 아니고,
이 책의 백미는 소설의 배경에 있다. 도쿄에서 JR 선으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가마쿠라.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도 만화 <슬램덩크>에도 나온 소도시로, 가마쿠라고쿄마에(鎌倉高校前) 역 앞 기찻길은 <슬램덩크> 팬들의 오랜 성지다. <츠바키 문구점>에는 가마쿠라의 신사와 맛집과 카페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마침 몇 해 전 그곳을 다녀온 나는 책을 읽는 어느 틈에 자꾸만 가마쿠라를 빨빨 다니고 있었다.
‘진작 읽고 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판권을 들춰보니 국내 발행일은 2017년 9월 15일. 내가 다녀온 날짜는 2017년 9월 5일이었으므로 꼼짝없이 뒷북을 쳐야 하는 것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가마쿠라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울컥대고 올라왔다.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인지,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권남희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아예 가마쿠라 기행문을 실었다!
막장을 덮자 기분이 묘했다.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먼 여행을 다녀온 듯 얼떨떨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진정할 겸 백지를 꺼내 펜을 들고 머릿속으로 거닌 곳들을 적어 내려갔다. 가마쿠라 역, 쓰루가오카하치만궁… (훗날 갈 수 있다면 들를) 포포와 이웃 바바라 부인이 브런치를 먹던 ‘가든 하우스’와 포포의 할머니가 가장 좋아한 절 ‘주후쿠사’까지. 써놓고 보니, 으레 여행을 기록한 메모와 다를 바 없었다.
여행이 어려운 시기에 친구 A는 여행지 브이로그를 보고, 블로그 이웃 B는 가이드북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한다. (코로나 때문에 출간이 미뤄졌지만 가이드북을 쓴 저자로, 동종업계의 지탄 받을 발언일지 모르나) 때로는 가이드북보다 소설이 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서사가 있으니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 장소를 간접경험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슬렁거리는 중이다. 제2의 츠바키 문구점을 찾아서.
후기 : 이 글을 쓰고 수소문하니 젊은 소설가 6인의 단편 모음집 <소설 제주>라는 책에 제주의 바다와 숲길, 마을이 펼쳐진다네요. 제2의 츠바키 문구점을 찾은 듯 합니다만.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