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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김민정 Aug 28. 2020

피리를 부는 마음으로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22)

나는 좀 느린 편이다. 말이나 행동 따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농담에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영화나 드라마도 남들 다 본 후에야 보고선 지나간 명대사나 OST의 여운에 나 홀로 심취하기도 한다. 그런고로 유행에도 둔감한 편이다. 스마트폰도 회사에서 대부분의 일 처리를 단톡방에서 하게 되자 사야 해서 샀고, 옷도 취향껏 고른다. 취향은 잘 변하지 않아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스타일은 비슷비슷하다.     


최근 유튜브에 빠졌다. 역시나 몹시도 뒷북이다.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TOP3로 유튜버가 꼽히고,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신곡의 인기를 유튜브 조회 수로 가늠할 때도 ‘세상 참 달라졌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유튜브가 또 하나의 세상인 줄도 모르고.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코로나19로 여행을 못 가는 초유의 시대를 맞고 나는 비로소 ‘그 세상’에 입장했다. 그리고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을 몸소 실천 중이다.     


도쿄 브이로그, 싱가포르 브이로그, 뉴욕 브이로그… 이 시각 내 유튜브 검색 목록 상위에 열거된 단어들이다. 어젯밤에는 싱가포르에서 잠이 들었고, 오늘 점심에는 도쿄에서 밥을 먹었다. 이 글의 초고를 잡고 잠시 쉬는 동안엔 뉴욕에 다녀올 작정이다. 소파에 드러누워 영상을 틀어두면 나는 지금 당장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어디라도! 이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가, 요즘 사는 우리에게!     


2020년을 여는 1월 글에서 나는 올해의 여행 계획을 물었더랬다. 돌이켜보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이후 글에서 내내 여행을 대체하는 방식에 관해 썼으니까. 적당한 타협점을 마련해 지내고 있으면 반드시 예전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사태가 길어지면서 새로운 일상이 더 빠른 속도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과거의 일상을 회복하기보다 미래의 일상에 적응하는 게 차라리 현실적인 대처라는 듯이.     


인디언들에게는 ‘레인 스틱’이라는 이름의 전통 악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비 피리.  그것을 불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 죽은 선인장 줄기로 피리를 만들어 ‘레인 스틱’이라 이름 붙인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그 피리를 분다고.     


뉴스를 보다가 우리에게도 ‘레인 스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급하게 바라다가 섣불리 속단해서 화를 키울 게 아니라 ‘그날’이 올 때까지 피리를 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단정히 꾸리는 자세. 그러는 사이 뜻밖의 길로 들어서 뜻밖의 것을 덕질하며 뜻밖의 나를 만나는 일. 대체재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보완재가 되기도 하는 경험. 그렇게 일상의 ‘뉴노멀’을 세워가는 것 말이다.     


1월 글을 다시 읽었다. 마지막 문단에 눈길이 머물렀다.      


‘올해는 어디로 여행갈까?’하고 생각하다 문득 질문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무엇을 여행할까?’ 2020년의 여행자에겐 이 쪽이 더 어울리는 질문이리라.      


당시에는 여행 트렌드가 어디로 가느냐에서 무엇을 하느냐로 바뀌고 있다는 뜻에서 썼으므로 맥락은 전혀 달라졌지만, 어쩐지 지금도 유효한 질문 같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여행할 수 있을까? 무엇을 여행이라 할 수 있을까?     


앞서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한 말, 취소! 질문에 의미를 부여할 권리는 오직 답변만이 가지는 것을. 아, 이런, 또 뒷북.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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