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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 Jun 03. 2024

호모 스마트폰스

[7일 차] 폰페라다 -> 비야블랑카 델 비에르조

스페인에 오기 전에 배낭을 싸면서 막판에 가져갈까 말까 고민을 했던 품목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블루투스 키보드였다. 약간의 오작동이 있어서 몇 버튼이 잘 먹히지 않았지만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꽤 무겁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그걸 가져오는 것 자체가 뭔가 글을 쓰고야 말겠다는 하나의 욕심처럼 느껴져서 끝내 포기했었다. 그래서 순례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스마트폰 하나로 쓰고 있다. 근데 이게 참 정신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순례길을 걷는 것 중 좋은 점 하나가 대여섯 시간 동안 걸으면서 자연히 스마트폰을 멀리하게 되는 폰디톡스인데 그 과정에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폰하나로 기록하고 정리하려고 하니 별 수 없이 장시간 스마트폰을 봐야 하고 그러다 보면 평소처럼 스마트폰에 젖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마블 영화 '아이언맨 2'를 보면 팔라듐이라는 물질에 서서히 중독되면서 몸이 무너져가는 토니 스타크가 나온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면서 동시에 슈트에 전력을 공급하는 아크원자로의 부작용으로 신체가 계속 팔라듐에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슈트 사용을 멈출 수 없는 스타크 입장에서 팔라듐 중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 팔라듐을 대체하는 물질을 스스로 합성하기 전까지 병든 몸으로 작전을 수행하러 다닌다.


현시대 인간에게 스마트폰이란 팔라듐 중독을 피할 수 없는 아이언맨 슈트 같은 것이다.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고. 많은 기능을 제공한다는 표현이 어수룩할 정도로 그 존재는 이미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지만 그 기초 생활을 위해 쓰면 쓸수록 뇌가 망가진다. 스마트폰을 한 번 쳐다보고 나면 그 이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잘 생각이 안 날 정도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 영감을 그대로 담기엔 펜이 가장 좋지만 펜은 생각의 속도를 계속해서 따라가기 버겁다는 약점이 있다. 키보드는 영감을 많이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기 가장 좋으나 노트북을 가지고 오는 것은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대안 격으로 생각했던 블루투스 키보드도 여러 고민 끝에 욕심의 판정을 받았다.


사실 스마트폰이 최악이다. 짧은 메모에는 적합하나.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버겁고 눈과 화면 사이가 매우 가까워 영감이 훼손되는 정도가 가장 심하다. 같은 화면을 보는 것이어도 노트북을 할 때와 TV를 볼 때 와는 다르게 사고가 완전히 정지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고는 하는데 인간의 사고 회로를 구동하는 프로세스에 있어서 눈과 화면과의 거리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 안지라 별 수 없는 일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인간 생활의 중요한 덕목이니까. 사실 순례길에서 배우는 여러 가지 깨달음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덕목이기도 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전진하는 것.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조성되지 않은 채로 또 해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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