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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 Jun 07. 2024

입촉은 아직이었다.

[8일 차]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 -> 오 세브레이로

떠날 때 까지도 그 이름이 이름에 잘 붙지 않던 그곳 비야블랑카 델 비에르조를 떠나 다음 지역 오 세브레이로로 가는 길은 처음엔 무난했다. 찻길을 따라 변화가 없는 길을 계속 걷는 시간이 많아서 심지어 조금 지루하기까지 했다. 전날 체크인에서 호스트는 내일 아침 호스텔을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순례길이라고 이야기해 줬는데 그 뒤 디테일한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나가서 왼쪽만 생각해서 가다가 잠깐 길을 잘못 들긴 했는데 그 덕에 좋은 개천을 끼는 좋은 산책길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전날 마을을 돌 때 까미노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대략 눈여겨봤었기 때문에 큰 도시가 아니라 방향만 맞으면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순례길 또는 순례자생활은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스페인 북부의 날씨는 새벽은 춥고 9시 즈음 해가 뜨면 점차 더워지면서 12시가 넘으면 따가울 정도로 햇볕이 강해졌는데 그 덕에 아침에는 경량내피 위에 바람막이를 입고 출발을 하고 해가 뜨면 티셔츠와 바람막이 사이의 경량패딩을 벗고 오후에는 바람막이까지 벗고 순례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옷을 벗어야 할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을 내려놓고 한 겹씩 벗었는데 이 날은 걸으면서 바람막이와 티셔츠 사이의 경량패딩을 벗었다. 걸으면서 한쪽팔만 배낭에서 빼낸 뒤 패딩 한쪽 팔을 벗고 반대편도 똑같이 한 뒤 패딩을 엉덩이 쪽으로 쑥 뽑으면 티셔츠와 바람막이 사이의 패딩이 게살 빠지듯 쏙 뽑혀 나왔다. 선크림도 처음엔 아침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바르고 출발했는데 어두컴컴한 아침에 그날의 준비를 모두 챙겨하는 게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해가 뜨면 그제야 걸으며 이곳저곳 바르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걷는 행위가 점차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다른 행위를 동시에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준비가 그랬던 것처럼 점차 하면서 하자는 생각이 더 강해져 갔다. 준비와 실행을 명확히 구분하지 말고 행동 속에 준비를 병행하다 보니 보다 경제적이 되고 하나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적으로도 제법 여유가 생겨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짧게 치고 빠지는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나보다 앞서 걸어가는 노부부가 있었는데 우연히 아내분의 신발을 보니 끈이 풀여있어 횡단보도를 건너가며 이를 알려주었다. 노부부는 그들을 지나치며 앞서 가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은 전했다.


하지만 그런 여유는 전반적으로 찻길을 따라 걷는 구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구간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사라져 갔다. 어제 그 남자의 말처럼 오 세브레이로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폰세바돈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 입'촉'을 완료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입촉은 아직이었다. 폰세바돈은 촉의 수도 성도가 아니라 중간에 나타나는 하나의 봉우리에 불과했던 듯하다. 오세브레이로로 올라가는 길은 폰세바돈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파른 경사를 자랑해서 사실상 등산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바닥은 질고 언젠가부터 바닥에는 동물의 대변이 자주 출현하였는데 그 색깔이 흙색과 비슷하여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냥 지나치다가 밟을 뻔했다.


등산을 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한 번 탄력을 받았을 때 계속 계속해서 오르는 게 결과적으로 덜 지치지 자주 쉬어버릇하면 더 오르기가 어려워지는데 이곳에서도 웬만하면 한 컷에 넘어가려고 했지만 경사가 심한 구간들에서는 도무지 쉬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쉴만한 적당한 높이에 박혀있는 한 돌멩이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는데 전날에 구매해 둔 초코스낵을 하나 먹은 게 텐션을 올리는데 꽤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이 길에 올랐다면 아마도 경험한 것보다 훨씬 힘들게 이 고개를 넘었어야 했을 것 같다.

고비는 여러 차례 찾아왔고 올라도 올라도 오 세브레이로는 생각보다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오 세브레이로로 가기 직전 어제 그 남자가 말한 듯한 마지막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거리상으로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지만 운동경기를 하면 체력이 고갈된 막판 10분이 훨씬 더 힘들고 길게 느껴지듯 얼마 남지 않은 그 구간이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그 초입에서 한 번 더 쉬고 가기 위해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한 서양의 여인은 앞에 펼쳐진 또 한 번의 언덕을 보면서 나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아직도 안 끝났다고?..."

이 마지막 구간이 정말 장관이라면 장관이고 가관이라면 가관이었는데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문명에서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날씨까지 더워져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와중 눈앞에 손바닥 만한 도마뱀이 나타나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살면서 생태공원 같은 곳을 제외하면 도마뱀을 눈앞에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풀 속으로 사라져서 겨우 그 형체만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비탈길을 따라 걸어갈 때는 말들을 만나기도 했다. 저 만 발치에서 한 남자가 유유자적하게 한 마리의 말에 올라타 다른 말을 이끌고 내 쪽으로 걸어올 때의 기분은 상상 속에 있는 듯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는 같은 현대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렵채취의 원주민 형태의 생활을 이어가는 오세아니아 섬들의 소수민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맥락으로 치자면 그 말들을 봤을 때는 마치 중세시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마리에 말이 내 옆을 지나가고 난 다음이었는데 저 앞에서 또 다른 한 마리의 말이 이번에는 성큼성큼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무리를 잠깐 벗어났다가 급하게 다시 대열로 복귀하려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는데 그 좁은 비탈길에서 한 마리의 말이 다그닥다그닥 내쪽으로 뛰어올 때의 기분은 정말이지 내가 이 말에 치여서 이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속에서 공포심이 피어오를 정도였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 말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내 옆을 지나쳐 주인이 있는 곳으로 합류했지만 옆을 스칠 때의 그 순간은 정말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을 오르며 계속 만나야 했던 동물이 대변들은 사실 이 녀석들을 마주칠 것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깔려있는 것들이었다.

그 말들을 지나친 것이 거의 마지막 고비였다. 이후 조금 더 발걸음을 이어가자 문명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고 최후의 작은 고개를 넘자 광활한 숲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오 세브레이로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마지막 고개를 넘는 지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통의 관악기를 불어 재끼고 있는 한 음악가가 마치 완주를 축하하는 듯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숨이 헐떡거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나는 그 남자를 대충 지나처 배낭을 내려놓고 앉을 수 있는 곳까지 마저 이동해 숨을 고르며 미션을 완수한 성취감을 즐겼다. 그 순간을 남기기 위해 넓은 하늘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호흡과 감정이 다시 온전해질 때까지 시간을 가진 뒤에 도착을 축하하는 그 뮤지션에게로 돌아가 조금 더 음악을 감상한 후에 1유로를 쾌척했다.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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