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세브레이로에서는 애초부터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오 세브레이로는 기존의 레온 주에서 갈라시아 주가 시작되는 곳이었는데 공립 알베르게에는 Xunta라는 명칭이 붙어있었다. 이 Xunta라는 명칭은 이후의 공립 알베르게에서도 계속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립'을 지칭하는 말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알아보나 갈라시아 자치주 정부를 뜻하는 말이었다. 공립 알베르게의 위치를 구글지도상에서 찾아내기 어려울 때는 일단 지역의 알베르게를 모두 검색한 뒤에 Xunta라는 명칭이 들어간 알베르게를 찾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부엔까미노앱이나 공식홈페이지에서 정확한 주소를 얻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고 드래그 앤 복사가 막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공립알베르게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거점 지역마다 운영하고 있었다. 갈라시아 지방만 그럴지도 모리겠지만 가격은 모두 10유로로 동일하였고 2층 침대를 모두 동일한 것을 사용하여 표준화되어 있었다. 레온에서와 달리 갈라시아 지역에서는 공립 알베르게를 많이 이용하였는데 매일매일 잠자리가 바뀌는 입장에서 시설이 표준화되어 있다는 건 적응에 큰 도움을 주고 시간도 아껴주었다. 처음에는 침대 주변에 전기를 충전할 콘센트가 없어 당황했었는데 알고 보니 머리맡에 있는 작은 등 밑에 유에스비 단자가 구축되어 있었다. 급속충전기와 달리 일반 유에스비 포트라 충전이 더뎠지만 자기 전에 이어폰과 보조배터리를 돌려가며 충전하고 잘 때는 스마트폰을 충전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공립알베르게는 전반적으로 시설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직원들도 기본적으로는 방문자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특히 리셉션에서 순례자여권과 일반여권을 확인한 뒤에 티켓에 내가 쓸 침대의 번호와 방 번호를 숫자로 표시해 주어서 헷갈릴 일 없이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굉장히 편안하게 느껴졌다.
다만 공립알베르게는 사립과 달리 인터넷이나 전화 이메일 등 사전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침대를 배정하기 때문에 순례길을 걷는 데 약간의 압박감으로 작용하는 것이 흠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순례길을 걸었던 5월 말~6월 초는 성수기까지는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만석이 되는 날이 없긴 했었다. 주로 1시부터 자리배정을 하는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도착한 사람들이 입구에서부터 줄을 만들며 앉아있거나 자신의 배낭을 내려놓는 것으로 줄을 만들었다.
주방시설은 모두 구비되어 있으나 식기나 조리기구가 아예 없거나 엄청 제한적인 경우가 많았던 것은 아쉬웠다. 요리까지 해 먹기는 어려운 환경이었고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반조리 음식을 간단히 데워먹는 정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레온 주였던 아스토르가의 7유로짜리 공립 알베르게에는 주방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사람들이 이런저런 요리를 해 먹었었는데 주정부마다 운영방식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 세브레이로의 공립 알베르게의 주방에는 다행히 최소한의 조리기구와 식기가 구비되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에 허기진 배를 달래러 주방에 갔다. 처음에는 전날 샀던 식품들 중에서 소시지를 구워 먹으려 했지만 식용유가 따로 없어 프라이팬을 망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더 아껴먹고자 했던 라면을 먹기로 했다. 깊은 냄비는 없었지만 파스타 정도 해 먹을 수 있을 법한 야트막한 냄비를 이용하면 어떻게 라면 한 개 정도는 겨우 끓일 수 있을 법했다.
하이라이트 특성상 처음에는 물이 잘 끓지 않았다. 최고 온도로 높여놔도 좀처럼 기포가 올라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점차 냄비의 물이 부글부글 대기 시작하여 수프와 면을 넣어 본격적으로 라면 끓이기에 도입하였는데 내용물이 들어가니 또 물이 잘 끓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다려보다가 약간의 걱정스러운 마음이 찾아와 식기건조대에 있던 규격이 맞지 않는 냄비뚜껑을 갖다가 덮어 씌웠고 그 뒤로 바로 끓진 않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마침내 라면이 끓기 시작했다. 냄비가 워낙 작고 얕았기 때문에 국물은 금세 졸아버리기 시작했고 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생수를 조금씩 첨가하며 라면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다 끓고 난 뒤에도 적당히 깊은 그릇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야트막한 그릇에 라면을 담았는데 이 라면 한 개라는 것이 아주 조금만 더 양이 많았다고 할지라도 넘처버릴 것 같은 정도로 아주 딱 떨어지게 라면이 담겼다. 주방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한 남자가 중간에 들어오면서 라면을 끓이는데 한 마디를 던졌다.
"Oh, Ramen, it smells good."
라면을 다 끓이고 나서는 먹기 전에 일단 냄비를 씻었다. 혹시나 내 뒤에 바로 누군가가 그 냄비를 쓸 수도 있다는 생각과 싱크대에 냄비를 던져두면 방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식사에 관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먹는 라면의 맛은 살면서 먹었던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기간 한식을 먹지 않은 그 배경 덕분에 라면 그 본연을 완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 나트륨 알갱이 하나하나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수프가 혀에 가하는 자극이 매우 풍성하게 느껴지는 그런 온전하고도 깊은 라면의 맛이었다. 냄새를 많이 풍기며 식사를 하는 것 같아 아까 들아오며 나에게 말했던 그 남자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잠깐 동네를 둘러봤다. 폰세바돈이 그랬던 것처럼 원체 산꼭대기에 있는 마을이라 그 규모가 조그마했다. 마을 입구에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어 들러본 후에 까미노를 상징하는 열쇠고리 하나를 샀다. 주인 양반은 내 타이밍에 전화를 받고 있어 잠깐 기다렸는데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 나를 붙잡으며 국적을 물었다.
" 어디서 왔나요?"
" 아 한국에서 왔습니다."
" 잠깐만요 "
데스크 밑에서 무엇인가 주섬주섬 꺼내던 주인은 이내 나에게 작은 배찌를 건네주었다. 까미노의 상징인 조개껍데기와 태극기가 함께 있는 작은 배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나는 선물이냐고 물었고 주인은 그렇다고 나에게 답변해 주었다. 작은 감동을 받은 나는 나도 모르게 주인에게 악수를 청했고 연신 붙잡은 손을 흔들다가 가게를 나왔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선물에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하기까지의 피로들이 풀어지는 듯했다. 참 낭만 있는 기념품 가게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