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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객 Jul 30. 2024

글로벌 인플레이션

[12일 차] 포르토마린 -> 팔라스 데 레이

마음의 여유란 두 가지의 조건에서 피어오른다. 경제적 여유. 그리고 시간적 여유.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는 서로 종속적이다. 경제적 여유는 시간적 여유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가능하게 한다는 말이 그것이 언제나 일치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한 달 일주일 내내 스케줄이 가득 찬 성공가도를 달리는 어떤 연예인들이나 많은 돈을 벌지만 야근과 주말근무에 시달려야 하는 어떤 직장인들. 소위(세상에서 말하는 바) '돈 쓸 시간이 없다.'는 푸념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놀이를 즐기는 데에는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다. 가진 시간의 가치는 그 시간에 투여할 수 있는 자본에 큰 영향을 받는다. 경제적 여유가 크면 가진 시간에 가 닿을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진다.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서로 균형이 맞을 때야만 비로소 '경제적'이라는, 그리고 '시간적'이라는 그 앞단의 수식어에서 탈피한 진정한 의미의 여유가 만들어진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조그마한 여유는 9천 원이라는 추가 자본 투입만으로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의 발걸음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웠다. '발걸음의 속도'라는 물리적 차원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겠지만 마음으로 치면 두 세 배의 차이가 나는 듯했다. 같은 공립알베르게에서도 나는 꽤나 늦은 출발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포르토마린을 떠난 무리 들 중에서 아마 꽤 후방을 차지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순례길을 걷는 하루의 상황을 여유 있게 세팅해 두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어떤 호주인과는 순례자들의 전형적인 인사말 '부엔 까미노' 대신 '긋모닝'이라는 조금 더 일상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 사람이 먼저 인사말을 건네왔고 내가 똑같은 인사말로 응답을 주었는데 평범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니 그 순간이 조금 더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특별한 여행이 일상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갈망하는 무엇을 풍족하게 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간식을 집안에 잔뜩 쌓아두었을 때 오히려 그것을 덜 탐닉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 조금 지쳤나요? "

" 네? "

" 조금 지쳤냐고요(웃음) "

" 아,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웃음) "

" 저는 조금 지쳤네요(웃음) "


길을 걷다 보니 또 한 명의 순례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직 하루의 트랙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지치지 않았냐고 물어오는 것은 조금 낯선 일이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상태를 궁금해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지쳐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듯했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여성 순례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이었는데 중간 지점 레온에서부터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나와 달리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상장 피드포트부터 여정을 시작했다고 했다.


" 작년에 저도 미국에 가봤었어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피닉스, 라스베이거스에 갔었죠. "

" 아 피닉스에도 갔었군요. "

" 네. 선인장이 많은 국립공원을 가봤어요. "

" 저는 피닉스의 뜨거운 날씨를 좋아합니다. "

" 진짜요? 저는 타버리는 줄 알았는데(웃음) "


피닉스의 날씨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 그대로 미국 애리조나 주의 피닉스라는 도시는 무척이나 더웠기 때문이다. 거길 가보면 이 도시가 왜 '피닉스(불사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온몸에서 화염을 내뿜는 불사조의 모습처럼 도시 전체가 이글거리기 때문이다. 피닉스에서는 여름이 되면 일사병으로 죽는 노인들이 많다고 한다. 미국을 방문했던 10월에도 날씨가 그렇게 푹푹 쪘으니 그 시기가 여름이라면 오죽할까 싶었다.


" 제 동생은 LA에 살고 있어요. 그쪽은 렌트비가 엄청나게 비싸죠 "

" 저는 서울에 살고 있는데 서울도 마찬가지예요. "

" 저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살고 있어요. LA만큼 집값이 비싸지는 않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비싸지는 것 같아요.. "

" 요즘에는 정말 모든 것이 비싼 것 같습니다. "

" 그러니까요. 저는 식료품이 왜 그렇게 비싼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요즘은 마트에 가면 정말 모든 것들이 비싼 것 같아요. "

" 맞아요. 걔네들만큼은 비싸면 안 되죠! 며칠 전에 트라야 카스텔라의 마트에서 감자칩을 하나 샀는데 그게 1.8유로더라고요. 2018년에 유럽에 자전거 여행을 왔을 때는 과일이나 먹을 것들이 정말 쌌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


여러 가지 근본 원인이 있겠지만 코로나19 이후 우리 시대가 맞이하고 있는 급격한 화폐가치의 하락과 그로 인한 물가와 주거비용의 상승은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온 세상을 뒤 흔들고 있는 듯했다. 밥 한 끼 차한 잔만으로도 돈 몇 만 원이 우습게 나가는 세상. 그로 인한 약간의 공포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불현듯 한 우울감을 우리 마음에 꽃피게 할 수 있지만 그 문제가 나만의 문제는 아니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거쳐가는 군대를 두고 '뭐' 같아도 평등하다고 속되게 표현하고는 하는데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처지인 동지를 만나고 나니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만드는 공포심이 조금은 경감되는 듯했다. 


" 아, 저는 이제 알베르게가 너무 지겨워요. 내 방의 침대와 마음 편한 샤워가 너무 그립네요. 그리고 지금은 커피 한 잔이 너무 마시고 싶어요. "

" 아, 저도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네요. "


수십일을 걸어 지칠 대로 지쳐 보였던 노스캐롤라이나의 그녀는 계속해서 나와 함께 길을 걷던 중 카페가 나타나자 고민할 것도 없이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 그녀는 나에게 함께 들어갈 것이냐 물어왔지만 나는 조금 더 걸어야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나 또한 카페에 앉아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언어적인 한계와 이야깃거리의 고갈로 더 이상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 한 잔 마시며 여유 있게 보내는 시간은 오롯이 혼자서만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9천 원의 추가 자본을 투입해 얻은 여유는 글로벌 친구와 천천히 대화하는 시간을 제공했지만 그 여유는 혼자만을 위한 시간을 위해서도 활용해야 하는 총량이 정해져 있는 한정된 자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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