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토마린을 떠나 도착한 팔라스 데 레이는 교회에서의 미사가 유명한 도시였다. 첫 만남 이후 계속해서 마주쳤던 미국인 피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은 팔라스 데 레이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는데 그는 나에게 미사에 참석하느냐고 물었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이 도시의 교회가 미사가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종교에 상관없이 가볼까도 했지만 그냥 알베르게 안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포르토마린을 떠날 때 예약을 했던 사립 알베르게는 도시의 약간 외각에 있었다. 그래서 도시의 중심을 거친 후 다시 한적한 곳으로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처음에 입장했을 때는 리셉션 데스크에 아무도 없었는데 인기척을 내자 옆의 바에 있던 직원이 프런트로 와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스페인 억양이 많이 들어간 영어 발음은 데스크에 세워져 있는 유리막까지 통과하니 거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략의 뉘앙스만 가지고 의사소통을 해야 했는데 한 가지 알아듣지 못한 말을 체크인 이후에 다시 들어야 했다. 그건 신발은 지하에 두고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내려놓았던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도미토리로 올라가려고 하는 나에게 그 직원이 붙잡듯 던지는 말이었다. 자세히 보니 리셉션 데스크 부근 바닥에는 신발모양과 화살표 모양의 픽토그램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고는 옆에 있는 스툴에 앉아 밖에서 신던 신발을 샌들로 갈아 신었다.
도미토리는 가장 꼭대기 층인 3층에 있었다. 3층이라고는 하나 지상층을 제외한 층 수 여서 사실상 우리식으로는 4층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알베르게에는 조그마한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현대식 엘리베이터가 아닌 무엇인가 고전영화에 나올 법한 오래된 엘리베이터였다. 실내는 좁고 속도는 느렸다. 한 번은 신발장과 함께 지하 공간에 있는 세탁실에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었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서 이게 실제로 내려가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더 중요한 것은 작동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서 한동안 그 좁은 공간에 갇혀버렸다는 것인데 엄청나게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갇혀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 순간 꽤 무게감 있는 공포를 느꼈다. 다행히 버튼을 아무렇게나 막 누르다 보니 엘리베이터 문이 곧 열리긴 했는데 어떤 알고리즘으로 동작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 첫 번을 마지막으로 그 엘리베이터를 다시는 타지 않았다. 그 덕에 도미토리를 오갈 때마다 꽤 높은 4층 높이를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그나마 샤워실이 같은 층에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하룻밤을 보낼 도미토리는 꽤나 깔끔한 상태였다. 사방이 노출된 일반적인 2층 침대가 아니라 커튼만 치면 사방이 가려지는 벙커 형태의 2층 침대는 마음만 먹으면 주변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새파란 색의 커튼은 더운 날씨와 대비되게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시원한 느낌이 드는 듯했다. 벙커 안에는 두 가지 수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머리 위에 위치한 단순한 단이었고 하나는 발 쪽 천장에 매달린 캐비닛이었다. 캐비닛은 잠금장치가 달려있고 이를 개폐할 수 있는 열쇠까지 딸려 있어 귀중품을 보관하기 용이했다. 그곳에 돈이나 여권 신용카드 등 잃어버리면 안 될 물건들을 넣어두었다.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무엇인가를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사립알베르게는 주로 시건장치가 포함된 케비넷을 제공했고 공립알베르게는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립알베르게에서는 귀중품을 적당히 배낭에 보관했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귀찮아져 대충 침대 위에 놓기도 했었다. 그날 머무르게 될 알베르게에 도착하게 되면 일단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빨래 등 정비를 서둘러 마쳐야 휴식이나 개인시간을 충만히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들이 점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것이 개인의 귀중품과 관련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느슨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산티아고 순례라는 대전제 속에 이 여정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집단의 무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까지 와서 남의 귀중품을 갈취하는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루 종일 걷고 난 후의 피로를 이겨내면서까지 자신의 도덕적 하한을 탐구하고 싶은 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그런 관념들이다. 그런 면에서 순례길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환경은 무해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하지만 캐비닛이 있을 때마다 무엇인가를 감추게 되는 모습은 불안감은 과연 어디서 조장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불안감은 낯선 이들과 한 곳에 머문다는 그 사실이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이 케비넷이 낯선 이들에 대한 의심을 조장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 인셉션에서는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똑같은 꿈을 꾸고 꿈 설계자가 꿈속 세상에 만든 가상의 비밀공간에 타깃으로 설정된 인물이 자신의 중요한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디카프리오를 포함한 주인공 팀은 이 비밀공간에 접근하여 그 정보를 탈취한 뒤 작업 의뢰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게 된다. 비밀의 공간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비밀의 정보를 그곳에 숨기게 된다. 사립알베르게의 캐비닛은 그 인셉션의 설정처럼 분명 그곳에 귀중한 것들을 숨기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의 소중한 것들을 감추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소중한 것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일까? 마음먹고 누군가의 물건을 훔치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라면 중요한 물건이 어디에 있을지 확실치 않는 배낭을 뒤지는 것보다 모두가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동일한 모양의 캐비닛을 터는 게 더 확실성 있는 작업처럼 보인다. 물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시건장치를 열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캐비닛이라는 물건 자체가 다른 사람을 의심의 대상으로 느껴지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찌 됐건 팔라스 데 레이에서의 저녁도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샤워를 한 뒤에 1층에 마련된 잘 정돈된 다이닝 공간에서 마트에서 사 온 샐러드와 가지고 다니던 빵을 잘라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지하 공간에서 손빨래를 하고 마련되어 있는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실내에서 빨래를 말릴 수 있으니 새벽에 이슬을 맞거나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빨래가 다 젖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남는 시간에는 1층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거나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도미토리의 통창을 그대로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이글거리는 태양은 거의 10시가 다 돼서야 지평선 아래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빛에 속아 넘어가 태양이 자취를 감추기 전 반바지와 바람막이의 차림으로 동네를 산책하려고 했지만 창문 안 공간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세차고 차가운 바람 덕분에 알베르게를 겨우 몇십 미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분명 바로 그 전날도 똑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 같은데 스페인의 태양은 그 가까운 기억조차도 금세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언제나 뜨겁게 타올랐다. 그건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내일은 없다는 듯한 열정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인간은 자신의 자취가 세상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는가. 그때는 별로 느끼는 게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태양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