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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객 Oct 23. 2024

사운드 오브 뮤직

[13일 차] 팔라스 데 레이 -> 아르수아

10대와 20대까지의 나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에서 음악을 빼놓고는 그 시절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돌이켜보면 음악이 없었다면 그 시절을 잘 견뎌냈을까 싶을 정도로 음악은 나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는 취미이자 일상 그 자체였다. 음악에서 치유받고 음악 속에서 나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았다. 딱히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음악의 정서나 메시지에 꽂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한 번 어떤 노래에 꽂히면 방바닥에 누워서 몇 시간 동안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는 했다. 음악이 주는 충만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에게 음악이란 세상 그 무엇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엄청난 양의 도파민이 분출되는 감정의 화수분 같은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순간 음악이 예전만큼 나에게 황홀감을 제공해주지 못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20대 후반과 30대를 지나면서 그렇게 변화한 것 같다. 음악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감정을 극대화시키지 못하고, 영감을 주지 못하고, 또 치유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은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느끼지 못하는 작은 절망감이 삶 속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나를 그렇게나 회복시키곤 했던 삶의 중추적 활동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게 됐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이나믹듀오 3집 앨범 마지막 곡인 'U-Turn'에는 1절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음악을 크게 틀어도 잘 들리지가 않았지 저만치 가장 먼저 내 곁을 떠난 건 로맨틱


삶의 무엇인가를 급하게 좇느라 음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예전만큼 잘 들리지 않는다는 개코의 가사는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음악이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나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묘미 중 하나는 고요한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이전에 말한 것처럼 주로 내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다. 고요함이 극에 달하는 장소를 지날 때에는 노이즈캔슬링을 켤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음악 소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 덕에 나의 온 신경을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자연 속에서 부활과 유재하 등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한 곡의 음악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발산되는 작은 소리들이 평소보다 생생하게 들렸다. 보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코러스. 클라이맥스로 향해가는 기타 솔로. 그렇게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세세한 소리 덕분에 한 동안 겉핥기처럼 소비되던 음악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만일까. 그 시절 방바닥에 누워 이어폰 하나만으로 몇 시간을 보냈던 그 황홀감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느낌과 감정이 늘상 들었던 음악으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사실 음악이 더 깊게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고요한 자연 속을 걸어서, 그래서 음악을 물리적으로 더 잘 들을 수 있어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마음의 상태도 그 차이를 만드는 아주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살며 마음에 담기는 버거운 감정들. 불안, 두려움, 긴장, 욕심, 좌절, 낙심, 허망함, 막막함, 모멸감 등. 그런 마음들이 나의 내면을 장악해 가는 동안 음악의 정서는 내 마음에서 설자리를 잃은 듯했다. 어쩌면 그 부정한 기운들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다시 일상의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마음 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음악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사실을 새카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음악이 예전처럼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소리라는 파동과 관련한 물리적 생물학적 문제가 아닌 그 파동에 온전히 공명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 그러니까 심리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팔라스 데 레이를 떠나 아르수아로 향하는 아침에도 나는 그 전날처럼 한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전날처럼 사립알베르게를 예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발걸음을 급하게 옮기지 않았다. 야외 공간으로만 이루어진 그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후에 나무로 된 테이블 하나를 잡아 배낭을 풀고 앉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을 들었다. 'Grey room'과 'colour me in' 좋아하는 두 곡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어도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음악에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감과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 감정이 몸으로 표현된 것은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힌 정도였지만 마음으로 따지자면 거의 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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