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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객 Nov 06. 2024

벌써부터 아쉬워지는 기분

[13일 차] 아르수아 공립알베르게

푸슛!


아르수아 공립알베르게의 뒤뜰에는 걸터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직전 편의점에서 산 맥주캔 하나를 경쾌하게 땄다. 그리고 꿀꺽꿀꺽 그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물로는 해결되지 않는 심한 목마름이 차가운 맥주를 마시니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편의점에 들렀던 이유는 2L짜리 생수를 사기 위해서였다. 생수를 구매하면서 맥주도 살지 말지를 고민했었다. 뭔가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닌데 습관적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땀을 흘리면 탈진의 경지에 도달할 것 같은 심한 더위는 맥주 캔 하나 정도는 허락할 수 있을 만한 신체 컨디션을 제공하였다. 오장육부가 마른오징어처럼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 편의점을 나서자마자 2L짜리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체내 어딘가 갈증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맥주 한 캔 정도를 추가 구매한 행위는 스스로를 지탄할만한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르수아 공립알베르게는 규모가 꽤 작았다. 1층의 리셉션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계단 끝 양쪽에 도미토리가 있었다. 서로 반대편에 위치한 두 개의 도미토리에서 왼쪽의 방은 천장이 낮아서 1층 침대가 많았고 오른쪽 방은 전형적인 모습이어서 다량의 2층 침대가 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비교적 늦은 시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었기 때문에 도미토리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비어있는 침대가 별로 없었다. 거의 문 앞에 위치한 빈자리 하나는 시선이 많이 모일 것 같아 다른 자리를 찾았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만한 자리가 없어 다시 돌아와 거기에 짐을 풀었다. 자리는 2층이었고 누우면 바로 앞에 창문이 있는 위치였다. 알베르게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침대 간격이나 복도 등이 전반적으로 비좁게 느껴졌다.  


점심에 문어요리 뿔뽀를 먹고 난 이후로는 딱히 다른 음식을 먹지는 않았다. 점심에 먹은 양이 생각보다 많았는지 배가 제법 불러서 별도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샤워와 빨래라는 양대 과업을 달성한 다음에는 렌즈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동네를 배회했다. 다다음날이면 이 여정도 마무리될 예정이어서 이렇게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주로 동네 이곳저곳의 놀이터나 공터를 돌아다니면서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간 이유는 햇빛이 강렬해서였기도 하지만 눈 둘 곳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도 하나의 이유였다. 어두운 안경알 뒤에 사람의 눈빛을 숨기게 되면 오해받을 만한 시선 처리를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하는 사람 없이 어딘가에 홀로 머무는 존재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만한 시선 처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대부분이 스마트폰 화면에 자신의 시선을 묶어두게 된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착용하게 되면 두 눈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쳐다보고 싶은 방향을 맘껏 쳐다볼 수 있게 된다. 그 상태를 적절히 이용해 가며 사람들이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낯선 곳에 함께하는 사람 없이 혼자 존재하는 내가 새삼 희한하게 느껴졌다.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거나 와인을 마셨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나와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놀이터 옆에는 제법 퀄리티가 좋은 놀이 기구 몇 개가 운영되고 있었고 부모들은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이름도 낯선 도시에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내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며 그 속에 잠시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을 그냥 느껴보았다. 해방감과 긴장감 사이에서 균형의 무게추가 왔다 갔다 하는 다면적인 감정 상태가 느껴지는 듯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에 나는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맡았던 자리 옆 침대 1층에는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정 전체를 통틀어 남녀가 한 침대에 같이 누워있는 장면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살짝은 당황스럽고 살짝은 낯선 마음이 나도 모르게 피어 나왔다. 하지만 내 침대 1층에 자리 잡고 있던 한 중년의 남성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멀뚱한 표정으로 책을 볼 뿐이었다. 낯선 장면을 선사했던 커플 중 남자는 핑크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 둘은 태블릿을 함께 가지고 놀며 한참이나 같이 있었다.



동네를 탐방하는 일정을 마지막으로 이제 딱히 해야 할 일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런 나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이글거리는 해는 쉽게 저물지 않았다.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이 태양과 함께였고 태양의 기운이 기어코 사그라진 이후에야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새벽은 자기 전 저녁보다 훨씬 더 저녁 같은 모습이었고 그 저녁스러운 새벽을 가로지르며 다시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날은 고작 이틀이 전부였고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도 한 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낯설고 두려운 감정으로 시작된 순례자의 생활은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체화되었으며 걸어야 할 시간이 아직 남아있는데도 벌써부터 아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다 먹기도 전에 벌써부터 아쉬워지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특별한 13박 14일의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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