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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Aug 17. 2020

몽골 여행기

#2017년 #여름휴가

이번 여름 휴가지는 몽골이라고 유진이가 말했을 때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왕 시원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둘만 떠나는 휴가이니 육아의 피로를 풀 수 있는 한가로운 여행이기를 바랐다. 동남아 어느 리조트의 풀사이드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다가 졸기도 하는 그런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몽골이라니. 유진이는 아무리 고민해도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며,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혼자라도 갈 기세였다. 휴가 출발 바로 전일 미국 출장에서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돌아와 밤늦게까지 짐을 싸려니 죽을 맛이었다. 화장실이 없을 때를 대비해 엄폐물이 되어 줄 우산을 챙겨야 하는 심정이란.


화장실이 있긴 있음...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울란바토르행 비행기를 타고 현지시간 12시쯤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전날 밤에 미리 들어와 있던 동행 커플과 한국인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직접 운전하는 구형 스타렉스 맨 뒷자리에서 여름휴가는 시작되었다. 일면 조르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한국인 가이드 빠기는 우리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출발이 지연되었다며 서둘러 차를 몰아 도시를 빠져나갔다. 울란바토르의 하늘은 북쪽 지방에서 났다는 큰 산불의 영향으로 매캐한 연기에 뒤덮여 있었다.


우리의 행선지는 울란바토르에서 서북쪽으로 약 600km 떨어져 있는 홉스굴 호수였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로 몽골에서 고비사막과 더불어 가장 인기가 많은 여행지라 들었는데, 나는 그저 따라가는 처지라 시큰둥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휴게소에 들른 시간 외에는 쉬지 않고 달려, 몽골 제2의 도시라는 에르데네트의 허름한 호텔방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종일 차를 타고 이동하여 오후 늦게서야 홉스굴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틀 내내 울퉁불퉁한 도로로 인해 덜컹거리는 스타렉스 뒷자리에 앉아 대부분은 졸았고, 가끔 깨어 동남아 어느 리조트에 있을 풀사이드 선베드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홉스굴 호수는 그간의 여로를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 허르헉 요리를 해 먹고, 달이 뜨지 않아 선명하기 그지없었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은 모든 몽골 여행자가 바라는 그대로였다. 바닥이 들여다 보일 만큼 맑은 물이 만들어내는 파란빛 호수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침엽수가 듬성듬성 솟아있는 초원을 가로질러 말을 탔던 일이며, 차디찬 호숫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던 일이며, 난로에 장작을 떼 훈훈해진 게르 안에서 일행과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던 일이며, 게르 앞 간이의자에 앉아 석양을 배경으로 책을 읽었던 일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왔던 길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스타렉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엉덩방아를 찧으며 풀사이드 선베드와 게르 안 나무침대의 간극에 대해 생각했다. 소비되어 버리는 편안함과 재생산해내는 불편함에 대해. 여행에서 조금의 고단함을 감수하면 더 깊고 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달여간 정처 없이 떠돌았던 인도나, 4일 꼬박 걷기만 한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여태 가장 소중한 추억을 남겨준 여행은 모두 배낭을 메고 떠난 여행이었다. 나는 멋쩍었다. 예전의 나라면 휴양지에서의 휴가를 분명 원치 않았을 텐데.


게르 안 나무침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몽골의 초원은 수시간째 이어졌다.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드넓은 광야에 소와 말과 염소가 한데 섞여 낮게 자란 풀을 뜯어먹고 있었고 드문드문 보이는 흰 게르가 무리의 주인을 짐작케 했다. 북방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하면 이 너른 땅을 이대로 가만히 놓아두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계절의 변화에도, 품 안의 생명에도 무심할 따름인 대지 위를 내달리며 나는 또, 시간이 남기는 상처에 대해 생각했다. 일상적인 실패들과 그로 인한 상처들에 대해. 세월이 부여한 여러 역할과 그에 따르는 당위 앞에서 나는 자주 실패했다. 크고 작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나는 주로 자책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려 하였는데, 그것이 나나 상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결과로 이어졌던 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광활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지 위에서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있자니 클로즈업된 감정들도 덩달아 줌아웃되는 것을 느꼈다. 명백히 시간은 이 땅에 흔적을 남기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태초의 땅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칭기즈칸이 호령하던 그 옛날과 지금 내 눈 앞의 풍경을 구분하는 것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와 전신주, 그리고 게르 옆에 간혹 서있던 위성 접시뿐이었다. 유구한 실패의 광야에서 나는, 나를 괴롭히던 실패와 상처도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괜찮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남아 어느 리조트의 선베드에 누워 졸고 있었다면 분명 느끼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몽골에서의 여름휴가는 덜컹거리는 스타렉스 뒷자리에서 명료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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