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에게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백지 앞에 앉았습니다. 지금 이 밤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어루만지며 4분 50초 동안 노래를 같이 듣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백지 위에 문장을 잇기라도 하며 마음을 달래 보려 합니다.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유독 가슴을 옥죄는 밤입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냈어도 3개월 간격으로는 꼭 다시 만나 그리움을 해소했었는데, 바이러스 장벽을 뚫고 인도에 온 지 이미 3개월이 지났고 다시 만날 날은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깊은 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도무지 감정의 갈피를 잡기 힘든 요즘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남편 없이 고집 센 5세 남아와 생후 7개월 영아를 혼자서 돌보아야 하는 유진과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납득하지 못하는 시원이를 생각하면 쓰라린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습니다. 8kg가 되었다는 소원이의 무게를 두 팔로 느끼지 못하니 온전한 정신을 잡아주는 평형추가 떨어져 나간 것만 같습니다. 혼자만의 호젓한 생활도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고, 반대로 시간 속에 고립되었다는 먹먹함만 남았습니다. 어쩐지 영화 <Gravity>에서 예상치 못한 사고로 우주 공간에 혼자 남겨진 주인공 라이언 스톤의 심경을 상상하게 됩니다.
깊은 밤 안개 속, 노랫말을 곱씹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입사 초 단체 합숙을 하며 처음 만난 유진의 독특한 매력에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는, 남자 친구가 있다는 유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치와 헤어지고 나와 만나자 했었지요. 미안한 얘기지만 그때도 지금도 전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는데, 어차피 이 사람은 나와 만나는 게 맞다는 예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렘 가득한 첫 데이트에 유진이 내민 선물을 받아 들고 그 예감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요. 그 선물이 바로 <깊은 밤, 기린의 말>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요샛말로 취향 저격이었고, 그것은 마치 천생연분의 징표인 것만 같았습니다.
노래를 반복해서 듣습니다. 이번에는 이른 새벽 짙은 안개 속을 함께 걸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로 돌아가 봅니다. 최소 100km를 걸어야 받을 수 있는 순례 증명서를 목표로,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3박 4일 동안 완주하는 일정을 짰지요. 그래서 다른 순례자들이 새벽부터 점심까지 걷고 알베르게에서 휴식을 취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오래 걸어야 했습니다. 운이 따른 첫째 날과 달리 둘째 날은 숙소를 찾아 헤매느라 40km 가까이 걸어야만 했지요. 5kg 배낭을 메고 발에 잡힌 물집의 통증을 참아내며 씩씩하게 걷는 유진을 보며 함께 걷는 미래를 어렴풋이 그려보았던 것 같습니다.
눈부신 청춘을 함께 지나와 어느덧 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김연수가 쓴 표제작의 부부처럼 육아 문제가 가장 큰일이 되었습니다. 추억을 말하고 이별을 말하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밤은 거의 없어졌지만, 까무룩 잠든 두 아이의 보석 같은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가슴속 깊은 뭉클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중요했던 둘째들이 만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또 인내하는 법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의 무지와 서툼이 혹여 아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을까 두렵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만큼 우리도 성장해 가는 중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주에 혼자 남겨진 라이언 스톤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끝내 지구로 돌아와 온몸으로 중력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흐느끼는 나를 보며 유진은 어이가 없었겠지만, 사랑하는 딸을 잃어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 그녀가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 돌아오는 여정이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영화를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나도 반드시 돌아가리라, 옥죄는 가슴에 눈물 짓는 밤들이 이어지더라도 온전한 정신을 놓치지 않고 돌아가서 사랑하는 유진과 두 아이의 중력을 온몸으로 느끼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결혼 7주년을 온 마음으로 기념하며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