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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Dec 17. 2015

송림동의 크리스마스 5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셨다.

책임감은 없었지만 멋과 풍류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가끔 아주 터무니없는 배포의 과소비를 하곤 했는데,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첫 번째 사치품은 은회색의 차가운 금속 몸체를 가진 커다란 오디오였다.

이 물건이 참으로 내 기억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을 보면은, 얼마나 그것이 그 당시 나에게, 우리 집안에게 이질적이고도 충격적인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심지어 그 당시 텔레비전이란 것도 가지지 못하였었다. 무엇이 당시 더 고가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이 코딱지 만한 단칸방에, 비닐 장롱과 문고리가 덜렁거리는 단스, 그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솜이불 사이에서 마치 빈민가에 주차된 리무진을 보는 것처럼 그 오디오는 우리의 분에 맞지 않은 생경한 무엇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좋아하였다. 휴일 아침이면 용접공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검붉은 얼굴과 대조되는 허연 런닝을 입고 오디오 앞에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카세트 테이프를 신중히 고르고 재생 버튼을 누르면 중독성 있으면서도 비감한 멜로디와 애절하게 앵앵거리는 여자 트로트 가수의 목소리가 좁은 단칸방을 가득 채워놓았다.

그것은 설핏 잠이 덜 깬 나의 귀에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의 일부처럼 섞여 들어와 몽롱한 내 의식을 부드럽게 잡아 흔들었다.

그리하여 취객이 기분 좋은 취기를 느끼 듯 눈을 뜨면 쪽창으로 퍼지는 아침 햇살에 밝은 그림자를 던지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그의 옆에 쌓아놓은  카세트테이프와 가사를 외면서 볼 수 있게 방바닥에 펼쳐진 테이프 속지 등이 보였다.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모르실 거야...'


많은 트로트 가수 중에서도 아버지는 특히 여성 트로트 가수를 좋아하셨다. 나는  그중에서도 주현미를 가장 좋아했다. 어쩐지 주현미의 노래는 부르기에 재미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소극적이고 돌부처처럼 입을 앙다물고 항상 언저리를 겉돌던 내가 이상하게도 노래하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하였다.

나는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녔고 어른들은 또 그것을  신기해하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서 나는 길을 걷는 와중에도, 혹은 어느 술집에서 지인과 술을 기울이다가도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곤 했다. 주위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심취한 적도 종종 있었다. 음악은 나의 인생에 가장 현실적인 환상이었으며 어쩌면 외부와 나를 차단하여 주는 껍질 같은 구실을 한 것인 지도 모른다.


살림이 피고, 단칸방이 방 세 개짜리 오래된 단독주택으로 바뀔 때쯤, 나는 교복을 입을 나이가 되었고, 은회색의 오디오는 검고 더 복잡하고 크기는 네 배가 넘는 전축 세트로 바뀌었다. 그 거대한 놈은 턴테이블과, 시디플레이어, 카세트 플레이어, 라디오 수신기에 제 몸의 반을 차지하는 두 짝짜리 앰프를 달고 안방의 한 면을 거의 전부  독차지하였다. 어머니는 규모에 맞지 않는 소비라며 몹시 성을 내었으나 아버지의 방종에 정작 신이 난 것은 나였다.


나는 어릴 때와는 사뭇 달라진 음악 취향으로 나만의 레코드 판을 모으는 것에 열중하였다. 주현미를 흥얼거리던 코흘리개는 어디 가고, 지하상가의 레코드점을 뒤지며 중고 엘피판을 모으는 음침한 십대 여자아이가 생겨났다.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 퀸과 섹스 피스톨즈, 너바나와 건스 앤 로지스의 레코드 판을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면서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녹음한 테이프를, 아르바이로 벌어 산 아이와 워크맨에 넣고 주구장창 들으면서 돌아다녔다.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서태지와 뉴키즈 언더 블락의 책받침을 가지고 다니며 하드보드지로 장국영과 여명의 얼굴을 덕지덕지 바른 필통을 만들 때 나는 외따로 떨어져 그들의 바깥에서 작은 이어폰으로 외부와 단절된 채 심장을 두드리는 묵직한 드럼 소리에 황홀경을 느끼며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곤 하였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나는 참으로 발전이란 것이 없는 인간이다. 항상 남과 다르고 싶어 안간힘을 썼고, 그들과 떨어지려고 하며, 언제라도 외롭지 않을 견고한 요새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같아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 강한  사람이군요.'라고 들은 그 많은 말은 사실 내가 그 누구보다도 유약한 겁쟁이라는 반증이다. 나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선택하지 않았고 타의로 고독하지 않기 위하여 자의로 고독을 택하였다.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고, 나에게는 모순되고 우스꽝 스러운 그 자존심 하나만이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지팡이이자 방패였다.


그러나 설령 내 마음 깊은 본심이 음악을 도구로 이용하게  만들었을지언정, 당시의 그 기쁨은 부정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동백아가씨의 애수에  아침잠을 깨는 그 순간과 턴테이블의 바늘을 맞는 위치에  올려놓고 머리만 한 헤드폰을 걸던 순간의 설렘. 그리고 내가 기대하던 선율이 귓바퀴를 돌아 머릿속을 점령하고 결국은 청각 이외에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며 나를 하늘 위로 올려놓는 무아지경의 순간을, 어두운 술집의 한 구석에서 동석자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크게, 흘러나오는 노래를 참지 못하는 비명처럼 따라 부르던 그 찰나의 일치감을, 나는 하나하나 선명하게 전구에 불을 밝히듯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행복했던 그 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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