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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28. 2015

송림동의 크리스마스 4

나의 어머니와 같은 이들이 송림동 달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에서 고단한 그네들의 삶을 나름 껏 꾸려가며 어서 이 지긋지긋한 불행의 모퉁이를 벗어나야겠다는 막막한 희망을 간신히 부여잡고 살아갔다면 나와 또래의 아이들은 나름대로 이 너저분한 골목 구석구석을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처럼 즐기며 사랑하였다.


앞서의 이야기로 누군가는 내가 아주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자연스레 동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가난은 불행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불행의 전제조건은 불만족이고 불만족은 상상 한계 안에서의 비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어렸고 우리의 세상은 한정되어있었다. 붉은 철탑에서 시작되는 세계는 불쑥불쑥 막다른 벽이 튀어나오는 예상할 수 없이 얽힌 미로 같은 달동네의 골목과 그 아래로 펼쳐진 공장지대, 우거진 수풀 안에 온갖 곤충과 작은 짐승들이 살고 있는 공터, 더 나아가 지금은 메꿔지고 없어진 만석부두의 쌓아 올린 통나무 산까지 이어졌다.


그 안은 모두가 같았다. 누가 더 가지고 덜 가지고 할게 없는, 그냥 고만고만한 이들이 찍어 놓은 듯 똑같은 드라마를 사는 현장이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가진 세상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면 되었다. 연탄을 한 장 한 장 올리며 남은  겨울밤의 일수를 손꼽아 보는 초조함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었으니까.


날이 밝아오고 맞벌이를 나간 부모를 대신하여 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에 훌훌 밥을  말아먹고는 나는 뛰쳐나갔다. 일요일 오전에는  골목골목마다 파마약 냄새가 풍기기 일쑤였다. 골목의 길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변덕을 부리다 못해 그대로 따라 걸었을 뿐인데도 문득 남의 집 앞마당에 들어와 있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돌아나갈 필요는 없었다. 사금파리를 모아 울타리를 치고 한 움큼의 흙으로 조잡스레 만들어놓은 텃밭을 껑충 뛰어넘으면 또다시 마법처럼 길이 생겨났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걷다 보면 산동네에서 유명한 야매 미용사 아주머니가 사는 집의 앞마당이 나온다. 누가 봐도 자매로 보이는 어린 계집애들이 나무의자에 얌전히 앉아 분홍색 천을 머리에 감고 파마를 말고 있는 모습은 일요일 아침이면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독한 화학약품의 냄새를 풍기며 어린 소녀들은 좀이 쑤시는 지 뻥 뚫린 하늘을 보며 하품을 하기도 하고 낡은 나무의자를 흔들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누가 더 크게 내나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미용사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일으켜 놀다 오라고 내쫓는다. 구르프를 잔뜩 말고 자매들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동네의 아래로 달음질쳐 내려간다. 사이사이 좁은 골목길이 어린  웃음소리로 분주해졌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길의 아래로 내려갈수록 골목의 집들은 번듯하게 구색을 갖추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얹은 담으로 둘러싸인 집들이 점점 눈에 띈다면 산동네가 끝이 났다는 신호이다.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미로에서 숨바꼭질과 잡기 놀이에 열중할 수 있었다면 그 밑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놀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아이들은 버려진 공터에서 돌멩이 밑의 땅강아지를 찾아내어 하루 종일 손바닥 안에 가둬놓고  간질간질한 느낌에 까르르 웃으며 놀거나 참새의 둥지를 찾아 날지 못하는 참새 새끼를 잡는데 소일하곤 했다.

좀 더 머리가 굵은 아이들은 현실적인 놀이에 집중했다. 아홉, 열 살 넘은 사내아이들은 부두까지 넓게 펼쳐진 공장지대를 걸어 다니며 고철 등을 모으곤 했다. 바닥에 떨어진 잡철 나부랭이를 재주껏 모아 동네의 고물상에 가져가면 그것으로 쏠쏠한 용돈벌이가 되었다.

일요일에도 연기를 내며 돌아가는 공장이 많았지만 문을 닫는 공장도 있었다. 문을 열었다곤 해도 일요일의 아침은 평일의 그것보다는 눈에 띄게 한적한 상태였고, 그것은 동네 악동들의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아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달동네가 아닌 아랫동네에 사는  고모할머니의 아들이었고 아랫동네에 산다는 것은 우리 살림보다 그네 살림 형편이 조금 더 나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조금 나았다고 해서 풍족하게 살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재도 용돈이라는 것은 구경도 못하는 송림동의 한 아이였을 뿐이다. 그도 다른 아이들처럼 일요일 아침이면 고철을 주으러 다녔는데, 가끔씩 공터에 와서 흙을 파고 앉아있는 나를 찾아 고철을 줍는 무리에 끼워 주곤 했다.


"저기 보이냐, 저 안쪽에 막대기 있지? 저것 좀 주워와라."


고작 여섯 살 정도의 나에게 아재는 종종 이런 부탁을 하였다. 공장의 열린 철문 안쪽으로 모아놓은 고철들을 주워 오라는 명령이었는데, 나는 물색도 모르고 그저 놀이처럼 그의 부탁에 응하여 작은 손으로 끙끙대며 그가 지목하는 물건들을 주워오곤 했다.

그럼 그는 나에게서 원하는 물건을 취한 뒤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빠른 걸음으로 나를 두고 가버렸다.

그래도 나는 당황하거나 겁내지 않았다. 천천히 길을 따라 동네의 유일한 고물상까지 걸어가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재를 만날 수 있었고, 또 아재는 내게 십원이나 이십 원 정도의 돈을 손에 쥐어주곤 했다.


어느 정도 사리판단이 될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아재가 내게 도둑질을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열  살 정도의 다 큰 사내아이가 도둑질을 하여 걸렸을 경우와, 대여섯 살의 어린 여자아이가 걸렸을 경우 처벌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혹 못된 짓을 하다 걸리더라도 나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나 그의 경우에는 명백히 의도를 둔 절도가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약삭빠른 계산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리 크다 한들 고작 열 살밖에 안된 아이인 것을.


그러나 그 당시는 내게 도둑질이라는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었고 다만 얼마간의 돈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 나는 틈틈이 모은 돈으로 여러 가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기쁨은 공터의 한 쪽에 자리 잡은 퐁퐁을 타는 것이었다.

커다랗고 동그란 원형 틀에 스프링을 잔뜩 걸어 탄력 있는 천을 걸어놓고,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아이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받아 장사를 하셨다. 트램펄린, 우리는 퐁퐁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때의 가장 큰 유희 거리 중 하나였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검은 천 위에서 발을 구르면 하늘의 모습이 눈앞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사지는 제멋대로 놀려지고 주체 못하는 몸뚱이가 바닥을 뒹굴다가 치솟다가, 때로는 다른 아이들과 호되게 이마와 정강이를 부딪히기도 했다. 한참을 그리 놀다가 시간이 다되었다는 할아버지의 재촉에 아쉽게 땅을 디디게 되면 마치 지면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익숙한 울렁증이 올라왔다. 우리는 그것마저도 소중하게 즐기며 한발 한발 아까운 듯 걸어 다녔다.


펼쳐진 회색의 공장지대와 버려진 공터, 낡아서 여기저기 기운 트램펄린, 그리고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가 우리에게는 디즈니랜드 버금가는 놀이터였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언제나 즐거웠으며 늘 해가 지는 시간을 아쉬워했다.

행복이 무엇인지, 단어조차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적어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누구도 불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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