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삶

250921 느혜미야 5:14-19

by 어린양


저는 믿음 때문에 불편해진 순간들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입사 두 달 만에 해고당했던 일입니다.

회사 대표가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따를 수 없었고, 결국 직장을 잃었습니다.

수습기간이었기에 노동부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기 어려웠고, 급여와 야근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분명 기쁨과 자유를 주지만, 때로는 불편함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제게 더 기쁘고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의 필요와 위험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과 다른 삶을 보여 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고 싶고, 더 제대로 믿고 싶어서 성경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배우고 적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성경공부가 잘못된 길로 흐르면 위험합니다.

사이비적 가르침에 빠지거나, 성경의 맥락보다 개인의 체험과 주장을 신격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님이 장님을 인도한다"(마태복음 15:14)고 하신 경고처럼, 분별 없는 학습은 결국 파멸로 갑니다.

반대로 공부가 흐지부지되어 친목 모임으로만 끝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곳은 교역자가 주도하지만 과정이 자격증처럼 단계·시험·서약을 강조하거나, 특정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친위적 구조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성경공부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줄 세우거나 몰아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제자는 교회 직분이나 시험 통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삶으로 본을 보이고, 또 다른 제자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 마을과 세상 어디에서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삶 전체가 헌신이어야 합니다.

쉬는 순간에도, 일하는 순간에도, 멈춰 설 때조차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

그것이 제자로 사는 길입니다.


짧은 영상에서 이런 표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곁에 계시다고 생각하면 쓰레기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 코조차 못 판다."

익살스럽지만, 삶의 모든 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냅니다.


믿음은 대형 사건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쓰레기 하나를 버릴지 말지 고민하는 작은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위기보다 더 무서운 내부의 불의


느헤미야서는 외부의 공격 앞에서 이스라엘이 연합했음을 기록합니다.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손에는 곡괭이를 들고 성벽을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내부에서 일어난 불의였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땅과 가족을 빼앗으면서 공동체는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흉년과 세금, 그리고 성벽 재건의 부담이 겹치면서 백성들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갚지 못하자 집과 밭,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담보로 빼앗기고, 자녀들마저 종으로 내어주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느 5:1-5).


율법은 동족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출애굽기 22:25)

"네 형제가 가난하여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인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 주며"(레위기 25:35-37)


그러나 본문은 이 금지가 무너진 현실을 고발합니다.

경제적 착취가 율법의 정신을 짓밟고 공동체 자체를 해체시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외부의 비판보다 내부의 불공정과 불신이 더 큰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세상에 지쳐 찾아온 이들이 교회 안에서 말과 행동에 더 크게 넘어지고, 결국 공동체를 떠나기도 합니다.


헌신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도를 고려하지 않은 강권, 배려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압박, 사생활을 침해하는 기도제목 공개, 지도자나 소수에게만 유리한 보이지 않는 규칙... 이런 것들은 믿음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제자의 삶은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의 경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팎에서 정의와 사랑을 세우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길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워야 할 기준은 분명합니다.

약자를 희생시키는 관행을 좋은 의도로 포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제목은 본인이 동의한 범위 안에서만 나누어야 합니다.(개인 → 소그룹 → 전체)

물질과 시간의 헌신은 각자의 형편에 맞게 존중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혜택보다 책임을 먼저 택해야 합니다.

정보와 권한, 기회가 특정 집단에 편중되지 않도록 절차를 투명하게 세워야 합니다.

이런 작은 균형과 절제들이 쌓일 때, 교회는 다시금 하나님의 공동체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모범과 회복의 길


본문은 회복의 과정을 네 단계로 보여 줍니다.

공개적 진단 → 공동체적 합의 → 제도적 시정 → 지도자의 절제.

이 흐름은 단순한 위기 대응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길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내부에서 일어난 경제적 착취와 불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과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며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너희가 동족에게 이자를 받는 것이 옳으냐."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빼앗은 토지와 집,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돌려주게 했고, 이자 거두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공동체 전체 앞에서 서약을 받아 이행을 확증했고, 옷자락을 털며 약속을 저버리는 자의 말로를 상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하며 합의에 동참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느헤미야가 문제를 개인적 선행으로 덮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공적 합의와 제도적 조치를 통해 구조 자체를 바로잡았습니다.

불의는 개인의 헌금이나 선의로 봉합할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구조를 고치는 일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세 가지 지도자적 모범


느헤미야의 삶에는 세 가지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 담겨 있습니다.

1. 가난한 자의 고통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능력

2. 부당한 착취를 멈추게 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단호함

3. 자신을 낮추고 백성을 섬기며 희생하는 자세


느헤미야는 문제를 숨기지 않고 백성을 모아 함께 해결했습니다.

불의하게 얻은 재물을 돌려주게 하고, 노예로 잡힌 동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부자와 지도자들에게 토지와 농산물을 돌려주게 하고, 동족을 압제하지 말라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며 권력을 가진 이들이 약자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고, 실제로 빚 탕감과 재산과 토지 반환을 명령했습니다.


또한 그는 총독의 특권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실 것이다"라는 고백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께 두고 그는 페르시아 왕의 관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로 섬겼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총독의 녹을 거절했고, 오히려 사비로 동역자들의 양식을 감당하며 백성의 짐을 함께 졌습니다.

가족과 함께 성벽 공사에 참여했고, 허드렛일까지 함께하며 백성과 같은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설교보다 예산과 식탁에서 드러났습니다.

특권을 내려놓는 절제가 실천으로 검증되었습니다.

그는 백성 전체가 함께 서약하도록 이끌어 회복을 공동의 책임으로 만들었습니다.

질책은 불의를 멈추게 했고, 실행은 실제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공동체는 경제적·사회적으로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다시 섰습니다.

성벽을 일으킨 힘은 건축 기술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비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느헤미야 5장은 오늘 교회에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공동체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함께 바로잡아야 합니다.

정의와 사랑은 선언에서 멈추지 않고 제도와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납니다.

오늘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려면 이 네 흐름—진단, 합의, 시정, 절제—를 따라야 하고, 그 모든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이름이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세우고, 눈물 흘리는 자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품어 주고, 때로는 교훈과 권징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잘못했을 때 먼저 은밀히 찾아가 권면하라고 하셨습니다.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세우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동체의 특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8:15-17).

출발점은 언제나 조용히, 은밀히,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되, 자신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살펴보라"(갈 6:1)고 말했습니다.

상대를 고칠 때는 온유함이 기본이며, 꾸짖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세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고 가르치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1-22)고 하셨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며, 언제나 최종적인 목표가 용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러나 공동체 전체를 흔드는 공적 죄는 공개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개인적 잘못은 은밀히, 공동체적 해악은 공개적으로—이 균형이 성경적 원칙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목적은 배제나 단죄가 아니라 회복과 공동체의 건강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인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덮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일은 관계를 끊자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더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길입니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어디서든 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불의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시대에,

"나는 누구의 자녀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나 공동체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용서와 인내는 언제나 중요하지만, 그것이 관계 유지를 위한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죽어 가면서 무작정 참고 버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닙니다.

내 영혼이 병들어 가는 관계라면, 건강한 거리두기도 지혜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되, 서로 상처 주지 않도록 접점을 줄이고 따로 살아가는 것—

이것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의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복음 앞에 선 우리의 태도


서울대학교 이문영 교수는 국제 정세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

이 진단은 교회와 사회에도 적용됩니다.

겉으로는 예의와 명분을 지키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위선이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거칠지만 숨김 없는 현실이 드러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100여 년 전 독일도 그러했습니다.

나치의 명령을 수행하며 학살에 가담하고도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 아이히만,

그리고 이를 분석해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정리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위선과 폭력을 드러내 왔습니다.


이 가운데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전후 교회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위기의 시대를 해석하며 신학과 교회를 새롭게 일으켰습니다.


그의 저서 "복음, 인생의 의미를 묻다"에는 이런 요지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은 부담 없이 차를 마시며 가벼운 주제로 토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복음은 온 삶을 바쳐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찾고 따를 준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부수는 망치이자, 동시에 다시 일으키는 위로입니다. 망치는 단순히 파괴만 하는 도구가 아니라, 고치고 수선하며 다시 세우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옛 자아를 깨뜨리고, 그 자리에서 새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결론과 작은 실천


세상이 교회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해 가는 것. 그리고 날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불의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시대에,

"나는 누구의 자녀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분명히 붙드는 것.

그 확신이 있을 때 교회는 다시 세워지고, 세상 앞에 담대히 복음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쓰레기 하나 버리지 않기, 길에서 하나 줍기,

걷는 기도, 호흡 기도, 짧은 30초 기도로 자주 하나님께 마음 열기,

무작정 편들기 전에 먼저 사실과 시비를 분별하기.


복음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제자의 길이 이어집니다.


참고

헬무트 틸리케, '복음, 인생의 의미를 묻다', 복있는사람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Penguin Books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발언, 국제정치 관련 칼럼 (2025)


본 묵상일기는 새숨교회 전영훈 목사님의 설교에서 받은 말씀을 토대로,

제 개인적인 생각과 일기를 덧붙여 정리한 글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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