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생인 내 아이는 올해로 6살이다. 햇수론 그렇지만, 12월생이다보니 동갑내기 아이들에 비해 아직은 발육이 느린 편이다. 그래서인지,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시켰 때도, 얼마 전 영어유치원에 첫 등원시켰을 때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나마 어린이집은 놀이 위주의 공간이다보니 아이의 적응이 느리진 않았다. 그런데 영어유치원은 좀 달랐던 거 같다. 쓰는 언어도 다르고, 교사도 원어민 선생님이다보니 환경이 많이 낯설었던 것 같다.
수업을 시작하면 금새 울음을 터트리고 선생님의 전화가 오곤 했다. "아빠, 엄마가 보고 싶다"며 아이가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는 하소연이다. '처음엔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니 낯설겠지'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마음 한켠에 드는 이런 다짐이 들었다. 아이가 지내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아이를 탓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난 어릴 적 내 모습을 통해 아이의 현재 모습을 진단해보곤 한다. 아빠인 나는 유치원이나 학교에 곧잘 적응했을까? 고교 시절 유학을 가거나, 대학에 입학해 현지 학생들하고 수업을 들을 때, 혹은 첫 직장 생활의 내 모습은 어땠을까. 사람들이 누구나 마찬가지이듯,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 힘으로 성장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내 아이는 이런 아빠의 DNA를 물려받았을테니, 내 아이의 부족한 점이 있다면 나의 어려웠던 순간을 기억하는 게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원어민 선생님들에게 선물해준 도넛. 아내 추천으로 샀는데, 꽤나 맛있다고 한다.
오늘 오후엔 휴가를 내고 아이의 유치원 등원 과정을 함께 했다. 원어민 선생님들이 (좋아할 만한) 도넛 선물도 챙겨서, 아이가 교실에 착석해 아빠와 오케이 사인을 주고 받을 때까지 그 공간에 함께 했다. 혹시라도 아이가 울 상황을 대비해, 유치원 인근의 카페에 앉아 내 일을 처리하곤 했다. 그리고, 아마 당분간은 이런 등원/하원 과정에 내가 함께 할 것 같다.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 그리고 설령 그 성장 과정이 더디더라도 옆에서 묵묵히 함께 해주는 게 한편으론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자칫 미화되기 쉬운 내 어린 시절을 포장해 얘기하는 것보다, 아빠는 성장 과정에서 어떤 게 힘들었는지 마치 친구처럼 털어놓으면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싶다. 우리 가정에 일방적 대화, 혼내기, 꾸짖음은 없다. 아이에게 삶의 용기를 조금이라도 일깨워주도록 노력하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론 아이에 대한 지도를 통해 남는 건, 내 자신의 성장이다. 다 큰 성인인 내가 무슨 또 성장이냐고? 아이에게 모범이 되려면, 나부터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더욱 모범적인 모습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발전하려면 부모 역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결국, 나를 비롯한 부모는 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영어유치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 딸아이는 한 인테리어 회사에 붙은 놀이동산의 궁전을 보고 "신데렐라 사는 곳 아냐?"라고 나에게 물었다. 이런 순수함을 지켜보는 건 행복이다.
집에 도착하면 아이와 나는 하나의 약속을 하곤 한다. 아주 작게라도, 다음 번, 그 다음 번엔 하나의 진전을 이루는 것이다. 힘겹게 영어유치원에 등원했다면, 그 다음 번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 그 이후엔 원어민 선생님들께 먼저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보는 것 말이다. 하나 하나의 과정이 어렵다면, 그 과정을 더 쪼개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발전하는 과정과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물론, 아빠인 나 역시 그런 작은 진전이 언제나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주변인에게 좋은 동료일까. 아파트 단지에선 솔선수범하는 주민일까. 부끄럽지 않은 연구로 후배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일까.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어른으로서 내 성장을 위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