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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섯 Sep 05. 2017

근황

지울지도 모르는 글

0. 일이 잘 안된다. 손에 잡히지도 잘 않지만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도 않는데, 진전이 없다.


1. 동네 뒷 산만 잘 타던 동네 산악부 대원은 가끔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곧잘 타곤, 스스로 산 좀 탄다고 생각했다. 설렁 설렁은 아닐지라도 나름의 여유나 템포를 가질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고, 산에 오르는 즐거움이나 과정에서의 보람도 어느 정도 느끼는 줄만 알았다.


2. 히말라야에 왔다. 쉬이 내걷던 한 걸음에 이리도 숨 가쁠 수 있는 줄은 몰랐고, 잠깐 이어지는 내리막에도 몇 번이고 휘청하고 휘청한다. 자연히 들이마시고 내뱉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진전은 더디고 욕심만 앞서서인지 나날이 느는 것은 오기뿐. 그래도 동네 뒷산과 이름 좀 있는 산을 좀 탔던 터라. 옛 가닥을 떠올리며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거칠게 숨만 가다듬는다.


3. 대기가 다르다. 대기에 짓눌려 생각 없이도 해내던 일들에 생각을 붙이고 붙여 더욱 어렵게만 만든다. 이러다가는 곧 낙오할 것만 같고, 이러다가는 몸성히 하산도 못하는 것은 아닐지. 벌써부터 내려올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다. 그 와중에도 숨은 가쁘다.


4. 스스로 대기만성형 사람이 아닌 것을 잘 알아서일까. 재미 삼아 오르던 동네 뒷산도, 시간만 있다면 오를 수 있던 이름 있는 산들의 경치도 근황도 그립다. 어찌 이 여정이 끝나면 그곳들은 한 걸음에 쉬이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이 여정은 끝은커녕 진전 조차 보이지가 않는다.


5. 타인의 성과에는 야박함이 앞섰고, 내 길과 방향에는 확신만이 가득했던 지난날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어찌 남아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6. 시간과 정신을 쏟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론을 동원해 앞으로 나가려고 애를 써본다. 어쩌면 이 시간과 과정을 견디고 올라설 때 새로운 장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작디작은 희망과 스스로의 보챔이 있기에.


7. 하지만 내일은 내일대로 새로울 것이고 오늘은 또 어제가 되어 뚜렷함만 잃은 지난날이 되어버릴 게다. 난 잘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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