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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노 Mar 25. 2023

스필버그 감독이 거장 존 포드에게 문전박대당한 사연

스필버그 감독이 <파벨만스>를 만든 이유는 뭘까

<파벨만스>

이 글에는 영화의 엔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내용을 알고 봐도 사실 상관없을 것 같은데,

스포일러에 완전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읽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는 알려진 대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제 스필버그라는 성은 딱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 or 작위 같은 단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지난 50여 년 넘는 시간 동안 스필버그 감독만큼 꾸준하게 대박을 터뜨리면서 실험적인 도전도 하고 걸작도 만들어내고 수상도 하고 돈도 버는 감독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서다.


블록버스터라는 업계 용어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얼마 전에 아카데미 시상식 리셉션 행사 자리에서 톰 크루즈에게 쿨하게 "네가 영화계를 구했다"며 마치 명예의 전당 대관식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때마침 스필버그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명예황금공상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고, 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생애 첫 자전적 스토리를 담은 <파벨만스>를 내놓았으니, 


혹자는 이게 설마 은퇴작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스필버그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 공로상 수상 소감에서 "난 아직 안 끝났다."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고,


심지어 그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이 기록을 세운 106세 연출 기록을 깨겠다고까지 선언했다. (아버지도 장수를 하셨기 때문에 본인도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ㅎㅎ)


뉴욕타임스는 스필버그의 <파벨만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 50년 동안 스티븐 스필버그는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영화로 옮겼다. 상어, 공룡, 친절하거나 또 아니기도 한 외계인, 해적, 스파이, 가상의 역사적인 영웅과 군인, 등등. 그만한 범주를 다룰 수 있는 제작자는 많지 않다. 그런 게 그가 지금껏 다루지 않은 주제가 단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그 자신'이다."


조지 루카스 감독이 <E.T.>의 흥행을 축하하면서 신문에 실었던 축전.



그의 나이 30대에 이미 <죠스><E.T.><레이더스(인디아나 존스 1편)>를 만들고

흥행의 역사를 평정해 버렸고, 


(1989년 당시 기준으로 역대 흥행 20위 영화가 뭐였는지 아시는가? 1위가 <E.T.>, 6위가 <죠스>, 7위가 <레이더스>, 8위가 <인디아나 존스 2-마궁의 사원>, 10위가 <백투 더 퓨처>(스필버그 제작), 16위가 <미지와의 조우>, 20위가 <그렘린>(스필버그 제작))


40대 시절에 <쥬라기공원>과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면서 흥행 감독에서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거장 대열에 올라섰고,



<쥬라기 공원> 촬영장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전쟁 영화 트렌드를 뒤바꿔버린 다음,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쉬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며,


<마이너리티 리포트><우주전쟁>, <뮌헨><링컨><스파이 오브 브릿지>, <틴틴의 모험><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신 분께서 


왜 이제 와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고 

(전작들과 비교하면) 참으로 소박한 영화를 내놓았을까.

그것도 코로나19로 전 세계 극장가가 위험에 빠진 이때에 말이다.


블록버스터의 창시자께서 손수 영화계를 단박에 구할 엄청나고 거대하고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작고 담백한 영화를 내놓은 이유가 뭘까.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저 또 한 편의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겠거니 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한 번 더 보고 곱씹어 보니, 혹시 이래서 <파벨만스>를 만든 건 아닐까, 거장 감독의 깊은 속내를 조금은 헤아려보게 됐다. 



<파벨만스>



서두가 좀 길었는데,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감독 자신이 지금껏 만들었던 자신의 영화세계에 헌정을 바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또한 그가 존경했던 거장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세계를 기리면서, 영화예술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매체인가를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영화다.


부연 설명을 좀 더 하자면, 존 포드 감독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덧붙여야 한다.


존 포드 감독



존 포드 감독은 미국 영화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감독 중 한 사람으로,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다져놓은 감독이며,


본인 스스로 서부극이라는 장르성,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는 폭력의 미학에 평생을 바친 감독이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세계 2차 대전의 끔찍한 살상 풍경 역시도 찍어낸 감독이다.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거장 중 한 사람이었던 존 포드 감독이

어떻게 미국 정부와 결탁해서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다섯이 돌아왔다: 할리우드와 2차 대전 이야기>에 아주 상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다섯이 돌아왔다: 할리우드와 2차 대전 이야기>



존 포드 감독이나 과거 할리우드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면 너무나 좋을 텍스트인데, 넷플릭스에는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실제 전쟁의 기록 영상 <다섯이 돌아왔다: 더 레퍼런스 필름>도 볼 수 있다. 물론 시청 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과 없이 너무 끔찍한 전쟁 참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


<다섯이 돌아왔다: 더 레퍼런스 필름>


존 포드는 실제로 2차 대전 당시 '야전촬영반'이라는 일종의 기록팀 소속으로 해군 특수부에 소속되어 전쟁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기록이 국가기밀 영상으로 묶여서 정부에 제공되기도 했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그의 작품이 <배틀 오브 미드웨이>라는 작품이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에도 존 포드 감독이 일본군 전투기 폭격 장면을 찍는 순간이 등장한다.) 


그가 찍은 이 기록 영상은 영화 세트장에서 꾸며진 폭력이 아니라 실재하는 폭력의 순간을 찍은 것이었고, 존 포드 감독은 그 순간에 예술과 사건의 경계에서 실로 이상하고 끔찍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감독은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찍은 자신의 영화에서 등장시켰던 전투기 같은 장비가 바로 그 이듬해에 실제 투입되고 그 현장을 찍은 것에 대해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아무튼 존 포드는 전쟁 이후에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와 수많은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영화가 바로 그가 말년에 만든 걸작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작품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스필버그 감독은 <파벨만스>에서도 이 영화를 굳이 언급한다.


극 중 새미 파벨만스가 보이 스카우트 친구들과 함께 극장으로 몰려가 관람한 영화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다. 그리고 새미는 영화에서 보여주듯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면서도 영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직업으로 삼게 되었고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장면,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새미는 상사의 주선으로 마침 사무실에 들어온 존 포드 감독과 독대하게 된다.


존 포드는 이제 막 입사한 새내기 스필버그 감독, 그러니까 새미 파벨만스를 문전박대하듯 하면서 


영화, 즉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평선의 위치'라는 점을 알려주고는,

"당장 내 사무실에서 꺼져버리라"라고 외친다. 아니 이게 웬 날벼락 맞을 소리인가. 


새미는 어리둥절해하지만 곧 환희에 찬 표정을 지어 보이며 스튜디오 문을 나서고, <파벨만스>의 야누스 카민스키 촬영 감독은 카메라를 한 번 흔들면서 존 포드 감독의 지평선 연설에 찬사를 보낸다. (메이킹 영상에서 좀 실망했는데 이 '틸트'는 카민스키 감독의 손이 아니라, '스테빌라이저'의 움직임이었더라. ㅎㅎ)


여기서 잠깐, 존 포드 감독이 왜 그렇게 어린 파벨만스에게 무례하게 굴었는가에 대해서

나만의 다른 해석을 덧붙여본다. 그는 생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나는 나와 대등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공손하게 대합니다. 내 아랫사람들은 더욱 공손하게 대하죠.

이건 영화적인 측면에서 하는 얘긴데, 나보다 잘난 놈들에게는 굉장히 무례하게 굽니다."


라고 말이다.


어쩌면 존 포드는 순수하게 동등한 위치의 감독 입장에서 스필버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질투를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ㅎㅎ



<파벨만스>



그렇다면, 스필버그 감독은 <파벨만스>를 만들면서 왜 굳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존 포드 감독을 등장시킨 것일까. 


그런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어떤 영화이던가. 


폭력에 맞서 '법질서'라는 정의로 심판하려는 세상 물정 모르는 변호사와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라스트맨 스탠딩 카우보이의 대결이 아니던가. 제목도 아이러니하게 포스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악당 '리버티 밸런스'를 사이에 두고 겨뤘던 싸움이었는데 그 결과, 승자가 있었나?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하게 외치던 변호사는 결국 폭력의 도움으로 성공한 정치인이 되어 살아간다. 과연 누가 승자인가. 그리고 쓸쓸하게 폭력에 모든 걸 걸었던 카우보이의 말년은 누가 기억해 주는가. 


평생을 바쳐 '폭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장르, 서부극을 카메라에 담아 온 존 포드 감독의 어떤 노년의 깨달음 같은 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담겨 있다면 스필버그 감독 역시 이를 인용하면서 선배 거장의 깨달음에 대한 화답을 한 것처럼 읽힌다. 

 


<파벨만스>



스필버그 감독은 일찍이 <뮌헨><링컨><워호스><스파이 브릿지> 같은 작품을 만들면서도 이와 유사한 고민을 영화에 담은 적 있는데 그의 가장 내밀한 가족사를 꺼내 보이면서 이를 다시 한번 언급한 것은,


결국 영화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카메라는 무엇을 찍어야 하는 지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관객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새미는 엄마의 사적인 비밀을 카메라에 찍음으로써 가족을 불화로 이끌었다는 죄책감과 함께 자신만의 세계를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영화와 편집의 매력을 함께 깨닫게 된다. 


스필버그 감독이 직접 "정의의 반대말은 망각"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잊지 않은 채로 자신을 혐오하고 놀리던 친구들을 영화로 깨닫게 해준다. 그 순간은 바로 카메라가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무엇을 편집해야 하는지에 관한 아름다운 학습이었던 것.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후 지금껏 만들어온 수많은 영화들이 바로 그 시절에 엄마를 통해 친구를 통해 존 포드를 통해 깨달은 영화예술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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