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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노 Jan 04. 2023

'슬램덩크'의 진짜 주인공은 누굴까?

추억의 슬램덩크 톺아보기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러 가기 전에 다시 살펴보면 좋을 원작 만화의 내용을 정리하려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슬램덩크>의 ‘진짜 주인공'은 누굴까?



이 만화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천재 강백호와 서태웅이라고 답할 것 같고,

마음이 좀 넓으면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까지 포함해 

북산고 스타팅 멤버 5인 전체가 주인공이라 답할 수도 있겠다. 


이 멤버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강백호를 ‘바스켓볼’의 세계로 이끈 소연이와 송태섭이 푹 빠져 있는 매니저 한나, 그리고 북산고의 스승인 안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고…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풋내기’들끼리 모여서 전국제패를 운운하며 겁도 없이 최고가 되겠다고 나섰다가 끝내 좌절하고 마는 <슬램덩크>의 결말은 만화 역사상 가장 멋진 실패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하다 못해 능남고의 윤대협이나 상양고의 김수겸까지도 주인공 못지 않은 존재감을 뽐낸다. 


그래서 이 만화에는 주인공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쯤 되면 진짜 주인공이 누군지 가려본다는 건, 취향의 문제가 된다. 

결국 누굴 제일 좋아하느냐는 질문이 되겠지.



나는 정대만을 제일 좋아한다. 그에게서는 돌아온 탕자의 비애가 느껴진다. 과거에 중학 농구 MVP까지 이뤘다가 채치수를 질투하고, 부상을 극복하지 못해 나쁜 짓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가 북산고 멤버로 코트에 다시 돌아오는 파란만장한 15살 청소년... <슬램덩크>의 다섯 멤버 중에서 가장 굴곡 있는 과거를 지닌 캐릭터다.


안 선생님 앞에 무릎 꿇고 농구가 너무 하고 싶다고 외치는 컷은 언제 봐도 명장면이다. TV판 애니메이션에서는 너무 싱겁고 짧게 묘사가 되어 실망스러웠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슬램덩크>의 수많은 명대사 중에서 이 대사는 안 선생님이 중학교 시절에 정대만에게 해준 말이다. 정대만은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전국대회 마지막 경기 산왕전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꺾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요즘 유행처럼 인용하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원조가 되는 격언. ㅎㅎ 그리고 이 말은 북산고의 마지막 전국대회 경기인 산왕전에서도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다.”라며 다시 한번 등장한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의 입장에서 정대만(일본명 - 미츠이 히사시)은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쓴 다른 대담 관련 책을 읽어보면 애초에 정대만을 등장시킬 때 농구를 하는 캐릭터를 그릴 생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런데 초반에 그리다 보니 그 인물에 정이 들어버려서 갑자기 농구를 시키는 인물의 이야기로 전환키게 됐다고...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3학년 채치수(센터)와 정대만(슈팅가드), 2학년 송태섭(포인트가드), 1학년 서태웅(스몰포워드), 그리고 강백호(파워포워드)가 주축이 되는 북산고의 농구팀이 완성되고 이들이 연습경기와 각종 훈련과 예선전을 거쳐서 끝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아깝게도 산왕전에서의 기가 막힌 역전극에 모든 힘을 쏟게 되고 그 후로 참패… 전국대회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되는 것이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원작 만화의 스토리 결말이다.


그래서 <슬램덩크>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하나만 더 살펴보자면, 


이번에 새로 만들어져 오늘 국내에도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왜 강백호나 서태웅이 아니라 송태섭일까, 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북산고의 다섯 멤버 중에서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기 좋은 캐릭터가 송태섭이다. 이노우에 작가는 이에 대해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한 적 있다.


“원작을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싫어서 다시 ‘슬램덩크’를 한다면 새로운 관점으로 하고 싶었다. 송태섭은 만화를 연재할 당시에도 서사를 더 그리고 싶은 캐릭터이기도 했다. 3학년에는 센터 채치수와 드라마가 있는 정대만, 강백호와 서태웅은 같은 1학년 라이벌 사이라서 2학년인 송태섭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송태섭을 그리기로 했다.” (이노우에 작가 언론 인터뷰 중 답변)


<슬램덩크>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부모가 누구인지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등학생들이니까 그들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중요했을 것 같지만 각 농구팀의 감독들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았았다. 청소년들만 등장해서 농구 코트 위에서 실력을 겨룬 다음 퇴장하고 또 다음 상대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사실상 전부이다 보니까 이 만화를 일본에서는 전쟁 드라마의 형태로 분석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소년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계속 싸워 나가는 이야기의 양상과 비슷하다는 것인데, 전쟁터에 나선 소년들에겐 부모란 존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외로운 십대들의 싸움이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분석이 작품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새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에는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가 새롭게 등장하니, 만화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꼭 한 번 보면서 만화의 재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봤으면 좋겠다.


“원작에서 캐릭터의 가족 이야기는 잘 그려져 있지 않지만, 이번 작품에서 송태섭의 가족 이야기가 상당히 깊게 그려졌다. 연재할 때 나는 20대였기 때문에 고등학생의 관점에서 더 잘 그릴 수 있었고, 그것밖에 몰랐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시야가 넓어졌고 그리고 싶은 범위도 넓어졌다. ‘슬램덩크’를 그린 이후, ‘배가본드’나 ‘리얼’을 그려온 것도 영향이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원작에서 그린 가치관은 굉장히 심플한 것이지만, 지금의 나 자신이 관련된 이상, 원작을 그리고 난 후에 알게 된 것 ‘가치관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어도 그 사람 나름의 답이 있다면 괜찮다’라는 관점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노우에 작가 인터뷰 중 답변)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도 나이가 들다 보니, 다시 한번 오리지널 스토리를 가지고 창작물을 만드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북산고의 전국대회 마지막 경기인 산왕전은 TV판에서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은 없다. 왓챠, 넷플릭스 등에서도 볼 수 있는 TV판 애니매이션은 전국대회 직전에 북산고 멤버들이 연습경기 삼아서 상양, 능남고 주요 멤버들이 섞인 혼성팀과 연습 경기를 갖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2만번의 슛연습을 거친 강백호가 점프슛을 처음 성공시키는 등 경기 내용은 만화에 등장하는 전국대회 첫 경기, 풍전고와의 대결 영상과 흡사하다. 이번에 개봉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산왕전은 그간 만들어지지 않았던 ‘첫 경기’인 셈.


애니메이션을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 다시 한번 만화를 보고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다. 


강백호가 마지막 역전 골을 성공시키던 순간, 자신의 왼쪽에 있던 서태웅의 패스를 받아내고는 슛을 쏘며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말할 때의 ‘왼손’의 의미 말이다.


만화 역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인 이 장면에서 강백호는 ‘왼손’을 두 가지 의미로 바라봤다. 하나는 자신의 왼쪽에 있던 서태웅이란 라이벌은 결국 나의 영원한 왼손임을 암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2만번 넘게 노력한 슛동작의 정석 그 자체의 의미. 그 결정적 순간에 강백호는 경기의 승리와 동시에 라이벌과의 경쟁에서도 이기고자 하는 기백을 보인다. 


산왕전 경기는 <슬램덩크>의 진짜 주인공은 강백호라고 답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결국 북산고는 이후에 전국제패 근처도 가지 못하고 토너먼트에서 떨어지고 만다. 주장 채치수는 이제 졸업을 해야 하고 강백호는 다시는 농구를 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위기에 놓인다. 열정과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강백호와 동료들의 전국제패 도전기는 어쩌면 무모했을지 모른다. 미래의 에너지를 선불로 몽땅 땡겨서 지불하고 빈털터리가 된 느낌이랄까.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북산과 산왕의 역사적인 경기는 통쾌한 승리로 이뤄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좌절의 뒷맛도 남긴다.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앞날에는 더 많은 기회가 놓여 있을 걸 알고 끝맺는 거니까. 그래서 <슬램덩크>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 캐릭터보다는 실패라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실패야말로 이 만화의 가장 멋진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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