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너 Dec 05. 2021

저녁이 있는 삶, 삶이 있는 저녁

퇴근길 단상

퇴근 시간이다. 퇴근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간다는 뜻이다. 당연히 사무직 노동자인 나는 사무실에서 퇴근한다. 경험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건설 노동자는 현장에서 퇴근하고 농부는 밭에서 어부는 해변에서 퇴근하겠지. 아무튼 운이 좋은건지 나는 매일 퇴근을 하고 있다. 물론 퇴근은 출근이라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번씩 찾아오기에 (아침마다 수고스럽긴 하지만) 퇴근의 기쁨을 위해 나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출근을 한다.


무슨소리를 하려고 이런 사설을 늘어놓느냐고 하겠지. 이런 얘기다. 누군가 산에 왜 올라가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산이 좋아 오른다고 하겠지만 내가 볼때 좋은 답변은 아닌 것 같다. 산에 오르는 건 내려오기 위해서다. 내려와 잔소리꾼 아내와 말썽많은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산에 오르는거다. 만약 산이 좋아 올라간다면 왜 힘들게 다시 내려오느냐는 질문에 뭐라 답변할 것인가. 마음이 변해서? 올라갈땐 좋았는데 올라가보니 개뿔도 없더라.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출근도 마찬가지다. 퇴근을 하기 위해 출근하는거다. 다른 이유는 없다. 퇴근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나 술잔을 나누고, 아내를 만나 잔소리를 경청하고, 아이를 만나 자상한 아빠 흉내를 내거나 아이의 서툰 거짓말에 돈을 뜯겨주면서 늙어가는게 진짜 삶 아닌가. 출근해서 퇴근까지 법이 보장하고 규칙이 강제하는 아홉시간은 정말 퇴근 이후의 진짜 삶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아닌가.


어느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했다지. 좋은 말이야. 우리가 박수치는 동안 '저녁이 있는 삶'은 '일가정 양립'이라는 말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게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둘다 별로다. '저녁이 있는 삶'은 저녁을 보장해주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보장된 저녁의 여백에 어떤 삶을 채워넣을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구호가 칼퇴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일가정 양립"은 늘 '생산성'이라는 말과 함께 다닌다. 가정이나 일터나 모두 생산을 위한 공간으로 보는 것 같다. 가정은 일터에 기대고 일터 역시 가정에 기반하는 구조다. 돈 많이 벌어야 애도 낳고, 애를 낳아야 사회가 유지되겠지만 인간을 그런 관점에서만 보는 건 아, 정말, 견딜수 없을 만큼, 싫다.


이제 ‘저녁이 있는  넘어 ‘삶이 있는 저녁으로 즐겁게 퇴근해야하지 않을까. 떡진머리로 출근전쟁을 벌이고, 백반집에 늘어선  줄을 기다려 위장을 채우고 기나긴 오후일과를 견디고 나서야 맞이하는,  해야 할지도 모르는 빈껍데기 '저녁 있는 ' 아니라 혹여 조금 늦게 퇴근을 하더라도 ‘진짜 삶이 있는시간으로 퇴근해야 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숨쉬듯 후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