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WE)라고 부르는 울타리 안팎의 풍경
캔에 자신의 똥을 담아 팔질 않나(만초니), 반으로 가른 돼지를 포르말린 용액 안에 넣어 전시하지 않나(데미안 허스트), 자신의 피를 응고하여 만든 두상을 전시하질 않나(마크 헌터), 아무튼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온갖 엽기적 시도에 비하면 귀엽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작업이 있었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 출품되었던 <코메디언>이라는 작품 이야기다.
바나나 한개를 은박 테이프로 고정해 놓은 일종의 개념미술 작품인데 그간 온갖 호러 엽기물에 충분히 익숙해진 관람자들은 이 귀여운 작품을 보며 바나나(물체)와 코메디언(개념)의 상관성을 떠올리거나 저마다의 해석을 하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이 바나나가 12만 달러에 팔리고 얼마 후 자칭 행위예술가의 입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말이다. 1달러나 될까 싶은 바나나 한개를 12만 달러나 주고 산 사람이 있다는 것도 경악할 이야기지만, 그 작품을 전시장에서 먹어치운 사람이나, 이를 오히려 반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바나나로 갈아끼운 작가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수많은 문제작으로 알려졌지만, 국내에선 비교적 최근‘ 바나나 작가’로 유명해진 이탈리아의 예술가 마우리지오 카텔란(1961년생)의 전시가 리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경험상 주말 전시는 예매도 어려울 뿐 아니라 관람객들의 뒤통수만 보다 밀려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일부러 평일 반나절 휴가를 냈다.
미술관 입구에 노숙자가 누워있다. 리움미술관 정문 앞에 노숙자라니. 불편한 마음으로 입장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혹 당신이 불편했다면 카텔란의 의도가 통한 것이다. 작가는 노숙자 조각을 미술관 문앞과 전시장 로비에(안으로 들어가면 또 한명의 노숙인 조각이 기둥 아래 앉아있다)에 둠으로써 미술관에 입장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문화적 자격이 따로 있는건 아닌지, 설령 정해지진 않았더라도 암묵적으로 그런 경계를 만들어 온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허위의식으로 예술을 소비할 거라면 당장 돌아가라는 엄포이거나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조롱 같이 느껴진다.
이탈리아의 갈바니 치즈의 포장지를 크게 전시장 바닥 한 가운데 박아두었다. “아름다운 나라의 치즈!”라니.(이탈리아를 아름다운 나라라고 할 근거는 무엇인가)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고 권력자를 풍자하기로 유명한 작가의 의도가 이렇게 단순한 카피로 요약될리 없다. 1961년에 태어난 작가의 성장배경과 전후 이탈리아의 복잡한 현대사를 보면 힌트가 나오려나. 어떤 정치적 의도가 짐작되는 작품이다.
아이처럼 체구가 작은 사람이 양복을 입고 무릎을 꿇고 있길래 다가가 봤더니 얼굴은 히틀러다. 게다가 히틀러는 무릎 사과로 역사에 남은 빌리브란트 총리의 포즈를 하고 있다. 일그러진 표정과 겸손하게 모은 손이 어울리지 않지만, 아이의 몸을 한 히틀러 역시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인류사에 영원히 독재자로 박제된 히틀러 앞으로 엄마를 따라 온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지나간다. 예술가가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
구멍 뚫린 바닥에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구멍에 빠진 걸까. 아니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모양일까. 구멍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사내는 까치발을 들고 전시장 바닥으로 올라올 기세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보아 당신들의 세상이 궁금한 것 같다. 카텔란의 얼굴을 한 조각상은 전부 아이의 몸을 가지고 있다. 성장하지 않은 자아의 상징일까.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성장하지 않은 소년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 않나. 무언가 충족되지 못한 결핍 상태의 자아는 살아가는 내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컴플렉스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반쯤 열린 냉장고 안에 한 여성이 웅크리고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한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다던 산울림의 노래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무언가 자꾸 주려고만 하는 어머니였을까. 카텔란에게도 어머니는 그런 존재였나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모정을 느꼈다. 땅 속에 파묻혀 손만 내민 사진 작품이었는데 제목이 <어머니>였다. 땅 자체가 모체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죽어서까지 손을 모아 기도하는 숭고한 존재를 표현한 것 같았다. 이제 그만 편하게 쉬세요 어머니.
말이 천장에 매달려있다. 말은 귀족같은 존재다. 승리자의 옆에 있거나 정복자를 빛내주는 모습으로, 또는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상징으로 많은 명화에 묘사된 동물이다. 그러나 카텔란의 말은 무기력하게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가 동물을 전시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전시장 곳곳에서 보게 되는 비둘기떼(도시의 공포와 외로움, 감시사회의 서늘하면서도 건조한 느낌을 표현한 듯), 리트리버 강아지, 말, 당나귀 등등이 전부 박제다. 안타깝지만 작가만의, 어떤 의도가 있겠지.
대놓고 폰타나를 모방한 작품인듯. 쾌걸 조로가 그어놓은 칼 자국인가 하고 제목을 보니 무제다. 작가의 작품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을 감상자에게 맡겨두는 것.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써의 예술.
작가의 발이다. 벽 한면을 꽉 채운 사진이라 압도되는 기분이 든다. 바로 코너를 돌면 목이 긴 운동화 안에 식물을 심어둔 작품과 연결된다. 흙속에서 묻혀 손만 내밀고 기도하는 작품 <어머니>와 연결된 작품인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의 기도에 힘입어 흙을 밟고 태어나 살았겠지.
귄터그라스의 <양철북>이 떠오르는 설치물. 전시 관람 중에 느닷없는 북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 가까운 곳에서 관객들을 내려다보며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가 북을 치고 있다. 성장을 멈춘 오스카 캐릭터는 그의 조각상에서 반복해서 변주된다.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관람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움측이 작품전시를 준비하던 당시는 참사 전이었다고 한다. 작업 내내 죽음(메멘토 모리)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메시지를 가장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문제의 바나나. 이걸 먹어치우는 사람 한명쯤 우리나라엔 없을까. 작가가 태도를 바꿔 소송을 걸거나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번 전시와 동명 타이틀인 작품 <WE>. 한 침대에 카텔란의 얼굴을 한 사내 두명이 나란히 누워있다. 동성애 코드가 읽히기도 하지만 묘하게 다른 두 얼굴이 다중인격을 강요하는 현대사회의 피로함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우리다. 우리라고 부르는 어떤 경계, 그 경계의 부당함과 구분된 세상의 안팎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저항적인 시선이 펼쳐지는 전시다.
전시는 예매가 필수다.
https://ticket.leeum.org/leeum/personal/exhibitList.do?fbclid=IwAR2wVzNb_NmEn-c-GZqTLggrTxAyHxQyqxc_pPkIKsyaHNPyJnTZPU1pZH0&mibextid=Zxz2c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