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톤 웨이
모바일 배틀그라운드를 한 2년 정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배틀그라운드 제작사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다. 한참 이 책이 페이스북 상에서 화제가 됐을 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많은 말을 남겼는데, 그중에 이메일 계정을 넘길 정도로 솔직하게 공개했다는 말에서 이 책은 사 봐야겠다 싶었다. 내가 독서와 워낙 멀어진 데다가 53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 보니 쉽게 못 펴봤는데, 웬걸 주말에 열어보고 정말 한숨에 후루룩 삼키듯 읽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라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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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르템 post mortem 라틴어로 '죽음 후'라는 뜻이다. 시체를 부검하듯 사고 이후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일이라고 한다. 스타트업이나 기업에선 사고나 실패 후 원인을 제대로 짚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거치는 단계로 기능한다. 이 책은 배틀그라운드가 나오기까지의 10년을 돌아보는 포스트모르템인데, 전례 없는 대성공을 거둔 배틀그라운드의 제작사에서 왜 이런 단계가 필요했던 걸까?
배틀그라운드라는 유례없는 성공작, 책 앞뒷면에 있는 '크래프톤 방식의 비밀' 같은 말은 마치 이 책이 성공의 비결을 알려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은 블루홀(현 크래프톤)이라는 회사의 실패기를 꼼꼼하게 기록한 성실한 실패담이다. 분량과 구성 자체가 그렇게 돼 있다. 책 전체가 530여 쪽인데 실패기가 500쪽이고 흔히들 잘 아는 배틀그라운드 성공기는 마지막 30여 쪽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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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부분을 봤을 때는 어떻게 실패한다는 건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스타트업 역사에 남을 회사를 만들고 네이버에 매각한 유능한 창업자,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 2 개발을 이끌었던 검증된 프로 개발진의 조합. 명확한 비전과, 경영-제작의 분리라는 이상적 원칙의 확립.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조직문화는 물론, 블루홀에 합류인 인원들도 인재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럼에도 회사의 일은 생각대로 안 굴러가고, 실패를 거듭한다.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처음엔 없었던 문제가 자꾸 생겨나고, 문제들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경영과 제작의 경계는 흐려지고, 자율이 사라진 자리에 '출근 시간 엄수' 같은 규칙들만 공고해진다. 구성원들이 서로를 비난하면서 창업자 간 갈등 끝에 나가는 사람이 나오고, 퇴사자도 폭증한다. 이 실패가 한 두 해에만 걸치는 것도 아니다. 배틀그라운드 이전까지는 거의 다 실패로 규정해도 무방한 움직임뿐이었다.
그럼 블루홀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실패를 충분할 정도로 경험하고, 방향을 조정한 뒤, '존버'했다. 물론 블루홀의 실패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실패와 실패 이후의 액션들을 디테일하게 짚어봐야 기어이 이뤄낸 성공의 의미도 제대로 곱씹을 수 있다. 배틀그라운드의 성공마저도 경영진이 '실패 이후 조정한 방향성'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경영진이 십여 년 간 실패를 거듭하며 기어이 만들어 낸 어떤 흐름 혹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책을 덮고 나니 당사자들이 왜 이 경험을 기록하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크래프톤 웨이>는 에필로그에 적힌 창업자인 장병규의 말처럼 '실행에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를 잘 다룬 기록이다.
아래는 읽으면서 마음에 조금씩 걸렸던 문장들. 책의 주제의식 뭐 이런 거랑은 별로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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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이 커질수록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직원이 전체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이들을 당장 내보내야 한다는 게 제 속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를 밀어붙인다면 전체 직원 가운데 절반이 도망갈 걸 제가 또 알아요. 회사를 다니다 보면 맘에 안 드는 인간이 한두 명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수고를 감수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자리를 지켜주세요. 저도 그런 생각으로 지금껏 일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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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팀과 PD가 같은 이야기를 해요. 그게 우리 업계의 비극입니다. 솔직히 저는 어떤 게임을 만드느냐에 관심이 없어요. 상상한 것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경영진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게임을 만드는 개발 방법론과 개발 과정에서의 검증 방법론입니다. 여기에는 팀의 역량을 스스로 체크하는 방법과 게임의 제품성을 검증하는 방법 모두가 포함돼야 해요. 이걸 준비하지 않는 한, 저를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저를 넘는다 한들 어차피 다른 경영진에게 걸릴 것이 확실하니까요. 열심이나 신뢰는 기본이지 장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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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강상욱은 장병규에게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실패 이후 추상적인 목표 3가지를 세웠다고 말했다. 첫째, 실패한 팀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둘째 성공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성공하는 사이클을 둔다. 셋째, 게임은 반드시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게임을, 나와 같은 유저를 대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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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조직은 없기에, 조직과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는 흔하게 발생한다. 조직도 나도 변하고 성장하기에, 지금 나에게 적합한 조직이 미래에는 아닐 수도 있다. 조직에 애정이 있다면 다름을 해소하도록 노력하되, 다음을 인식했으면 한다.
하나, 의견충돌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논쟁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점을, 공공의 선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에서의 논쟁 기준은 '조직 전체 그림에서, 장기적 관점에서 최선인가?'여야 한다.
둘, 전체 시스템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다양한 주체와 지속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특히 조직이 클수록 변화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 인식해야 한다. 국지적 이기심이나 단기적 대응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셋, 조직의 문제와 사람의 문제를 분리해야 한다. 의외로 조직이 아니라, 특정 사람이 문제인 경우도 많다. 심지어 제도나 절차로 풀기 힘든 문제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