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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Jan 17. 2017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공감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

내가 느낀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 단어로 감히 요약한다면, 첫 번째는 당연히 '작가'일 테고, 두 번째는 그의 작품에 재즈 음악이 잘 묻어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재즈 매니아'이고, 세 번째는 '러너(runner)'이다. 러너라니? 일반인이 달리기를 해봤자 얼마나 한다고 달리기가 한 사람을 정의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보통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꽤 진지한 런너이다. 매일 아침 10km 달리기를 수십 년 동안 지속해왔으며, 매해 풀코스 마라톤을 참가할 정도로 달리기를 정말 좋아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나는 아직 하루키만큼 열성적인 런너는 아니지만, 그의 이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구절에서 공감을 느꼈다. 하루키는 전업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달리기를 시작했고,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기를 이어왔다고 한다. 나도 2년 전부터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존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후 그것을 위한 동력원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하루키처럼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달려왔느냐라고 자문한다면 한없이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달린다는 것은 단순하게 육체적인 '달리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를 비롯한 많은 런너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충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많이 와 닿았던 구절들은 인용부호로 표시하였고 개인적 감상을 간단히 붙였다.



마음이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혹자는 술 한잔과 담배 연기 한 모금에 쓸쓸한 마음을 흘러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난 고등학교에서는 이럴 때마다 운동장을 달리면서 마음을 달랬고, 군대에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연병장을 달리며 약한 나를 탓하며 강해지려 했다. 이처럼 나에게 달리기는 약한 마음을 가졌던 나에 대한 분풀이였지만,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원래 분풀이하려던 약한 마음은 잊게 되고, 육체의 한계와 순간의 감각에만 집중하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되도록이면 그 모습이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켜) 소설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 붓기 위해 노력해왔다.


외롭고 힘들어도 달려라 하니



많은 운동 중에서 하필이면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도 하루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비슷했다. 사실 달리기야말로 운동 중에서 돈, 시간 그리고 함께할 상대 방중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달리는 것에는 몇 가지 큰 이점이 있다. 우선 첫째로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다.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가 있고, 그럭저럭 도로가 있으면 마음 내킬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그래도 걷지는 않았다."

그의 말처럼 달리기도 그렇고 산다는 것도 그렇다.

어중간하게 사는 것보다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전력을 다해서 매달리고,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단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중간하게 하다가 실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이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이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사이타마도 런닝10km를 매일 반복하면서 3년만에 최강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달리기가 좋습니다. 여러분

불건전함과 건전함을 함께 안아야 한다.

특히 예술을 비롯하여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달리기를 통해 더욱더 건강하고 건전함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루키는 역설한다. 나도 자리에 무조건 앉아서 머리만 굴리거나 술을 마시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가하고 건전하게 그저 달리기를 하는 도중이나 마치고 난 뒤에, 그동안 쌓인 생각이 자동으로 정리되면서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인 소설가가 된 이래 지금까지, 내가 몸소 절실하게 느껴온 것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 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그래서 마라톤 단련은 전혀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매일매일 집필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지탱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러나 사실 10km를 달리는 약 1시간 동안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을 계속 달려가고 있다는 하루키의 표현이 참 탁월하다. 이를 위해서는 러닝머신의 위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달려야만 한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끝은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철학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하루키는 달리면서 신체를 통한 실감을 했다고 한다.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꽤 철학적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철학적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말이 아닌 오직 신체를 통한 실감으로서, 말하자면 포괄적으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사실 좋은 글입니다.


그리고 문득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달리기에 빗대어 '끝'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니체는 음악에 빗대어 '끝'을 이야기했다.


모든 종착점이 목표는 아니다. 어떤 선율의 끝이 반드시 그 음악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 니체 -

하루키의 달리기의 실존적 실감과 니체의 음악에 대한 실존적 사상을 통해, 사실 '끝'이라는 것에 연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느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끝 혹은 목표 달성보다는

그저

우리는 달리기 내내 달리기를 즐겨야 한다.

우리는 음악 내내 음악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사는 동안 삶을 즐겨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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