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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Apr 17. 2020

무기력을 딛고 진짜 삶을 향해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고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고

에리히 프롬은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5가지의 19세기 악덕과 그 자리를 채우게 된 20세기의 특징들에 대하여 설명하며, 현대 신경증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첫 번째, 과거의 권위주의를 대신하여 현대에는 '익명의 권위'가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현대인 모두가 자신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확신할 것이나, 실제로는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과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생각에 사로잡혀 '시장, 여론, 혹은 건강한 인간 이성'이라는 익명의 권위에 조종받는다.


두 번째, 과거의 제국주의와 같은 야만적인 착취는 거의 사라졌으나, 이제 착취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점에도 이유가 있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자기 밖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두들 자신을 이용하며,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었다. 인격의 완벽한 발달은 뒤로 하고 사물의 생산 또는 돈이 중시된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은 발달하고 생산성은 높아져, 우리의 시간은 예전보다 절약되지만, 자기 자신을 착취하여 사물이 됨으로써 절약한 시간을 가지고 결국 무기력을 느끼며 시간을 죽이는 문제가 발생한다.  


세 번째, 차별은 폐지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한 추세이지만, 그 결과 달성한 동등권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낀 개인들은 더욱더 동등함을 추구해 가는 것이 신경증의 원인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타인과 동일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게 되는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강요가 없음에도 스스로 타인과 같아지기 위해 자신을 뒤에 둔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평등은 이런 종류의 동등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평등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한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네 번째, 과거에는 축재와 절약을 덕목으로 두었으나 오늘날에는 소비가 중요 덕목이 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소비하는 영원한 소비자가 되었다. 재화나 서비스뿐만 아니라 인간도 사랑도 소비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고, 소비 대상을 주입받게 된 수동적 소비자라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 과거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달리 현대인은 타인과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사생활을 누릴 수 없는 무능력으로 이어졌다.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 자유는 장애와 조건과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p.60
두려움, 공포, 질병, 노화, 죽음처럼 실제로 우리의 한계를 정하는 감정이다. 테야르는 진정한 자유는 이런 고통의 극복, 두려움과 공포의 극복에 있다고 본다.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야만 인간의 고통은 '신성'해질 수 있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p.61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나르시시스트처럼 거울 속의 자신만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에는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인 '소극적 자유'와 스스로 결정하여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적극적 자유'로 나뉜다. 소극적 자유만 있게 된다면 인간은 불신에 가득 찬 고립된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적극적 자유를 위한 자발적 활동이 자유에 대한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다. 자발성의 요인에는 크게 사랑과 노동이 있다. 바람직한 사랑이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함과 동시에 타인을 긍정하고 하나가 되어감으로써 그 양극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노동이란 창조로서의 노동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소유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과정 자체를 경험함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다르게 태어난다. p.85


적극적 자유는 개인의 고유함을 완벽히 긍정함으로써 시작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평등하지만 다르게 태어난다라고 말하였다. 우리 모두 다르게 태어났음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고유함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동등함을 추구함으로써 가짜 자아로 뒤덮이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데 쏟는다. 그런 행동의 전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전제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p.100


학창 시절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의 가치판단을 포기하고 주어진 일에 대하여 성실하고 묵묵히 따르는 데에 온 힘을 쏟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진한 최선 속에서 무기력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군가 시키는 일들을 다 이룬다고 해서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라는 것인가?


사회, 부모, 또래에 의하여 주어진 목표에 대하여 헌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정하는 것보다 오히려 쉽다. 진정 자신의 목표를 직접 세우고 이에 따를 모든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결국 누군가가 주입한 목표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가짜 자아와 함께 헛된 혼신을 다하곤 한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깊게 겪은 후 타인에게 순응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다가 타인의 생각에 부합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게 된다면 엄청난 고립과 고통을 느낀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진짜 삶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감탄의 능력, 집중력, 자아 경험의 능력,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


흥미롭다면 자세한 내용은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의 일독을 통해 확인하길 권한다.


그리고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의 [난 뚱뚱해]라는 노래에서 적극적 자유란 개인의 고유함을 완벽히 긍정함으로써 시작한다는 점을 느낄 수도 있으니, 이를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https://youtu.be/VxwprP-O0So


타이틀 그림 : 'Summer Interior', Edward H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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