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르코 Apr 24. 2020

사랑하는 마음에는 공정거래를 기대해선 안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당신은 '사랑'을 잘하고 있는가? 한 순간의 불 같이 타올랐다가 아쉬움만 가지고 꺼졌던 사랑이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 말이다. 사랑이 쉬웠다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매력이 넘치는 사람일 것이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이 상대방과 영속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확신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벌고 외모를 가꾸면서 매력을 키우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되물었을 때, 사랑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다. 우린 매일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그 치열한 삶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인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언젠가 나의 이상형의 조건에 모두 부합하면서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이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하기도 하고, 타오르는 성적 매력과 사랑받는 느낌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사랑을 시작했다가 허무하게 끝이 나기도 한다.

    동물처럼 본능대로 성적 욕구만을 중시하며 어떤 상대방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즐거운 느낌 자체보다는 태도에 가까우며 에리히 프롬의 표현에 따른다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픽업 아티스트들이 알려준다는 상대를 속여서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유도하도록 하는 그런 기술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춰진 기술을 의미한다.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의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의 기술을 경시하는 이유

     에리히 프롬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사랑의 기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가지가 있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사랑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력을 갖추기만 하면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있는 간단한 문제로 생각하고, 타자를 진정 사랑해줄  있는 지식과 노력에 대해선 고민을 게을리한다.  번째 이유는 사랑의 문제를 '능력' 아닌 '대상'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상' 중요하기에 이는 사랑보다는 소비 문제와 유사해진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기술을 경시하는 이유로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적 매력의 결합으로 인해 사랑의 최초의 경험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고 하더라도, 성적 매력만을 가지고 이러한 형태의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도대체 사랑이랑 무엇인가?

    일단,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 활동이다. 즉,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고 '받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행위의 객체는 '마음', '성적 절정', '물질적인 것' 등 여러 영역에 해당된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타자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격이 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이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며,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자는 외모, 물질적인 부, 친구 등 아무리 가진 것이 많더라도 심리학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사랑에는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존경이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이처럼 누군가를 존경하려면 그를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지식이란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있는지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통하여 '즐긴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로 인해 물질적 대상뿐만 아니라 정신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현대인은 사랑에 대해서도 공정한 거래를 희망하게 되었고,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씁쓸한 현상이 등급제의 결혼중개업이고 국제 매매혼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이처럼 자동 기계가 돼버린 인간은 사랑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는 '상호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이라는  가지 표준적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의 실패의 원인이 올바른 성행위에 대한 무지, 한쪽 또는 쌍방의 잘못된 성적 기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에리히 프롬은 이에 대하여, 정반대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사랑으로 인해 성적 행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제에 대한 증거는 여성의 불감증과 남성의 심인성 불능증에 대한 연구에서 ' 원인이 올바른 기술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억압에 있음' 증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 등은 부차적이며  이후에 생각되어도 충분한 것이다.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증오는 성적 행위라는 친밀한 행동을 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주지 못하며 자발적인 행동을 억압하게 된다. 이성에 대한 공포와 증오에서 벗어나게 됐을 , 성적 문제가 해결될  있는 것이지, 이것이 선결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성적 기교나 지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번째 사랑의 병리학적 형태는  사람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피난처를 찾고 세계에 대항하는 그들만의 동맹을 형성하는  목적이 있을  발생한다. 이러한 '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될  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으며, 상호 관용만을 강조하여 인내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평생 동안 남남으로 남아 있고 '핵심적 관계' 도달하기 쉽지 않을  있다.


갈등을 넘어 서로의 실존으로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이의 진짜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며 명료해지면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고 이를 말미암아  사람에게  많은 지식과 힘을 갖추게 한다. ,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귀는 것이 중요한데,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비로소 사랑이 가능하다고 한다. 도피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경험하고 서로 일체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신 집중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 정신 집중, 인내 그리고 최고의 관심이 필요하다 말한다. 먼저 최소한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데, 사실상 정신을 집중시킬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홀로 있을  있는 능력은 사랑할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정신 집중의 간단한 실천적 방법으로서, 에리히 프롬은 적어도 매일 아침 20 동안 그리고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과 생각을 제거하려고 하며 자신의 호흡을 따라가며 느낄 것을 권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지금 하고 있는  활동만을 유일하게 중요한 일로서 몰두하는 훈련 해야 한다.


자아도취의 극복

    다음으로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을 의미하며, 이에 대한 반대는 객관성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인 관계에서 자신의 입장만을 집중하여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며 현실을 왜곡하여 바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자아도취를 버려야 하며, 자아도취를 버리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생각할  있는 능력인 이성을 키워야 하며, 이성의 배후에는 겸손한 태도가 뒷받침되고 있다.


믿음

    마지막으로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믿음)'의 실천을 요구한다. 여기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신앙은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비합리적인 신앙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인 합리적 신앙을 지칭한다. 사람에 대한 신앙이란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신앙을 가지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된 '용기'가 필요하다.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며 격리와 소유를 안전책으로 삼아 칩거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고 타자와의 사랑에 성공하기 어렵다. 사랑은 용기를 가지고 어떠한 보증도 없이도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한 사랑을 위해 이제 사랑의 기술의 연습하고 실천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공정거래법이 없음을 명심하자. 


타이틀 그림 : 'Over The Town' by Marc Chagall
매거진의 이전글 무기력을 딛고 진짜 삶을 향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