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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Dec 03. 2016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삶의 그림자가 아닌 본질을 찾아서



65세의 비정규직 노동자인 조르바와 34세의 고용주인 주인공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인간이란 자유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주인공은 자유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하던 일은 그만두고 갱도 사업을 구실로 고향을 떠나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르바를 만나면서 자유로운 인간이 어떤 것인지 글자가 아닌 실체로서 확인한 경험의 기록이 바로 이 책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처음에 조르바란 인물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마초, 상남자, 바람둥이, 로맨티스트 그리고 비이성적인 사람에 불과하지 않느냐라고 예단하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지루하게 교육과정을 밟아온 착실함 사람이었고, 이런 나의 눈으로는 조르바란 인물이 신기하면서 거북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이 온전하고 자유로운 것이냐라고 자문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조르바가 부러워졌다.


  “...<왜요>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됩니까?”
- 조르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어떤 일이든 이유를 찾아야 하고, 무의미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자유롭지 못한 자는 가슴 속에 불꽃같이 떨리는 마음에 대해 바람같은 이유를 불어 꺼버리곤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젠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 카잔차키스 -

타락이라는 단어가 마음 속 한구석을 찔렀다. 우리는 조르바의 정의에 따르면 타락한 방향으로 교육받고 있다. 고등학교, 그리고 그 상자를 벗어난 대학에서 어떠한 젊음이었는가 돌이켜 본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몸의 수십 배 이상을 뛸 수 있는 벼룩도 유리컵 안에 담아두고 나중에 꺼내면 그 유리컵 높이만큼 밖에 뛰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의 젊음도 유리컵 안의 자유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르바처럼 '바보짓'을 어떤 이유도 따지지 않고 충실하게 하는 것이 자유이다.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 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바보짓 말이에요.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 조르바 -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현재에 온 힘을 다 쏟고, 현재를 온몸으로 느끼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조르바가 일에 집중하는 모습, 오르탕스 부인과 있을 때 그녀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점점 그의 마초성이 자상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였다. 작가가 이러한 조르바에게 얼마나 감탄했으면 이렇게 말하였다.

  

  “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내 오감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
- 카잔차키스 -



  “오, 내가 당신만큼 젊었더라면! 어디든 한번 이 대가리를 처넣어 볼 겁니다. 일, 포도주, 사랑, 뭐든 말이오. 나 같으면 하느님도 악마도 두렵지 않을 겁니다. 젊음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그의 말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 남들이 말하는 실패를 하게 될지라도, 그 바보짓이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음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다음은 갈탄광 사업이 망한 뒤 든 주인공의 생각이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 카잔차키스 -


행복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자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조르바와 주인공도 이러한 행복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을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이는 모순적인 말 같지만,  자유로운 사람이 몰입하는 것과 같고 그러한 경우 행복할 것이다.


사실 행복은 멀리 있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은 책 어느 부분에서 공자까지 인용하며 이를 강조한다.

  “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지당한 말씀! 따라서 모든 사람에겐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네.”
- 카잔차키스 -

부, 명예, 권력 어느 것도 가지지 않았고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조르바는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삶을 온전히 느꼈으며 가장 자유로웠으며, 그가 바로 진정한 인간이었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책 속에서만 진리를 찾고 사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작가가 책의 도입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떠난 것처럼 이제 나도 그림자가 아닌 본질을 찾아 움직여야겠다. 



  “나는 그 여행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는 거이기나 한 듯이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갈 테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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