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아래 Feb 02. 2024

그들은 과연 고도를 만나게 될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관람후기

    고도는 기다리며는 산울림극장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이다. 지난해 '플레이위드 햄릿'연극을 관람하러 산울림에 갔다가 입구벽면에 걸린 극장 연혁을 살펴보니 나는 아마도 97년 무대 올려진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나 보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그때의 나는 연극이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고도라는 인물이 과연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내가 지금 뭘 본 건가 프랑스식 대화를 너무 직역해서 내가 못 알아듣는 걸까, 왜 모든 대사가 손발이 오그라들듯 한 건지 그리고 왜 이렇게 졸리는 건지... 부조리극이라니 인생 살며 이보다 더한 부조리극을 또 보게 될까 등등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랫동안 내게 연극이라는 기억의 시초이고 기준이 되었다. 덩그러니한 나무 한 그루의 무대는 어떤 공허한 순간, 예상치 못한 적막한 공간, 기시감이 드는 어떤 순간에 데자뷔처럼 떠올랐고, 갈피 없는 막연한 순간에 '그러니까 고도나 찾아야겠다'는 핑계의 언어로 써먹곤 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늦은 가을 어느 동네 벽면에 붙은 종이포스터에서 고도를 기다릴 두 노배우의 얼굴을 보았다. 꽤 긴 기간의 공연일정이었고 극장은 무려 국립극장이었다. 가게영업이 어떨지 모르니 표를 미리 살 수 도 없고 망설이다가 깨달았다. 연극의 고전, 국립극장 그리고 당대 최 대배우의 출연이라는 조합은 빠른 전석매진을 부른다는 것을. 이제 좀 들여다볼까 했을 때엔 이미 구매할 수 있는 표는 없었다. 포기하려니 뭔가 오기가 생겨 나는 며칠 저녁 인터파크 티켓 창을 들여다보았다. 무심한 마음으로 창을 열었던 그제 밤 어색하고 수줍게? 1석의 여분이 보였고 빛의 속도로 결제까지 끝내고 다음 날 점심 영업 마무리를 엄마와 알바에게 부탁하고 종종 잰걸음으로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수요일 오후 3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의 객석이 주는 그 푸근함이 좋았고 어떤 자리에서라도 무대가 다 잘 보이도록 설계된 극장이 좋았다. 그냥 그 시간에 내가 거기 있던 게 좋았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그냥 압도
평생 담고 살아온 적막과 공허의 이미지

    

    그래도 20여 년 만의 재관람이니 복습이 필요할까 하여 짧은 검색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었다. 고도란 누구이며 혹시 실체가 없다면 신을 비유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작가의 대답은 일단 연극을 보고 그 내용은 집에 가서 맘껏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가게로 내려오는 길에 머릿속에 채워지는 극의 내용, 인물의 행동, 상황들이 휘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유행 지난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한심한 내용의 대사들이 그리고 어떻게든 고도가 오기까지  그 시간을 견디려는 그 노력들, 좌절하고 분노하고 분노한 척하고 소외받고 누군가의 폭력에 상처를 입고 남의 것을 취하고 버리고 다시 취하고  그게 모두 누군지도 모르고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리고 '왜' 기다리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는 이 모든 일들은 고도를 기다리며 생기는 일들이지. 나는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 다시 함께 고도를 기다리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그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 모든 대사와 행동 어디에도 튕겨져 나옴 없이 모두 대입되는 이 상황. 아 예술에 삶을 투영하여 답을 찾아가는 게 이런 건가! 그 답이..... 아마도 고도인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무 살의 나를 놀라게 했던 마치 이건 코미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린 고도의 존재가, 지금 50세를 바라보는 지금의 나에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답에 대한 실마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긴 시간을 혼자 보내오면서 나는 오랫동안 변변찮은 결과로 점철된 시간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미리 찾아온 우울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 나는 최대한 잡념을 만들지 않으려 뭐든 집중할 거리를 찾았고 잠을 미루고 악몽을 피했다. 그것이 돈을 버는 일로 연결되었다면 나는 지금 아마 성공하고도 남았겠지... 가끔 내 성향이 아쉽기도 해.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등바등 살아온 날들이 회한이 되고, 나이 들어 기능이 약해지는 신체를 받아들이는 그런 잔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쉬지 않고 바쁨을 각인시키며 숨 가쁘게 살다가 갑자기 겪는 여유시간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 정리하고 단절시켜 아무도 만나지 않기 시작한 이후의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 모습이 마치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디디와 고고와 같지 않은가.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고목가지에 밧줄을 올려 목을 매려는 그 심정도 그저 우리들이 겪는 그런 감정의 극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갑자기 사는 게 의미가 없어 살아있는 의미를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 그렇게 고목에 줄을 매어 목을 매는 그런 심정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오늘의 경계가 모호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앞으로 미래, 노년의 나는 지금 보다 더 격한 삶의 무게,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되려나.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니 죽음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철학이 있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극한의 부정적 감정에 휩싸일 때에는 살아있어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만 같은 괴로움에 나를 갉고 또 갉게 된다. 그래도 혹시나 고도를 만나게 되면 이 시궁창 같은 해골로 꽉 찬 골짜기에서 구원받고, 벗어날 방안을 제시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을 겪어내었으니 내일도 모레도 살아있는 동안 그 시간을 기다려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듯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정말 매우 무척 너무나 졸린 연극이다.

    그리고 갑자기 명치를 때리듯 매 장면과 대사들이 내 뇌를 자극한다. 아 이번 관람에서 이토록 큰 반향을 얻게 된 건 대 노배우님들의 목소리, 톤이 큰 몫을 했다.  보고 나서 젤 먼저 나직이 내뱉은 말이 '아 진짜 연극을 봤네'라는 말이었으니. 이 배우님들의 목소리, 딕션, 와 박정자 선생님의 표정과 그 알 수 없는 대사들을 쏟아낼 때의 몰입. 부조리극을 관람하는 고통을 관람의 예술로 역치 하는 순간들.

이제 어느 시기에 노년이 된 내가 그때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하며 내가 지금 이 연극을 보고 있구나.. 떠올리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의 나는 디디와 고고의 시시껄렁한 행태를 통해 무엇을 얻게 될까.

그때가 되면 실체 없는 고도가 누구인지, 어느 시공간에서 평행을 걷느라 서로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나, 곧 자아라고 그러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고  기다린다 한들 만날 수 없는 실체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게 될는지. 자꾸자꾸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무모하지 않게 그러나 더 늦지 않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