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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Feb 18. 2021

핸드폰과 안경 없이 떠난 낯선 산책

'소셜 딜레마'가 깨우쳐준 어쩌면 당연한 사실

오늘은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로 정했다. (이렇게 정하지 않으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느낌이 하루 종일 든다.) 눈 떠질 때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해 먹고,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다가.. 알고리즘의 덫에 빠져 한참 시간을 보냈다. 느지막이 점심을 사 와서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먹는 것에만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창 밖을 보면서 음미하며 먹다가, 슬슬 지루해져서 넷플릭스를 켰다. 최근, 주변에서 추천받았던 ‘소셜 딜레마’가 생각났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플랫폼과 SNS의 토대를 만든 사람들이 윤리적인 이유로 일을 그만두고 만든 다큐멘터리이다. 나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데이터를 수집해서, 내 관심사에 맞는 콘텐츠를 보여주며 더 오래 머물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광고를 판매하기 위해 알고리즘이 짜여있다. 


‘내가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내가 상품이다’라는 말과 어떻게 (고객이 아닌) ‘유저’가 조종당하고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에 속이 메스꺼워져 핸드폰을 바닥으로 (살살) 던져버렸다.


저녁이 되자 슬슬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어 요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해 죽겠다고 징징대자 바다 산책을 가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핸드폰을 두고 가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저녁 8시 반은 어두컴컴했다. 여러 번 가본 길이지만, 괜히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혹시나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괜한 걱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 핸드폰만 없을 뿐인데 골목길을 혼자 걸으니, 발소리에 예민해졌다. 반대로 길을 가던 남자가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사실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안경을 끼고 나왔는데, 숨을 내뱉을 때마다 안경알에 김이 찼다. 김이 찬 세상보다는 흐릿한 세상이 나을 것 같아서, 안경을 벗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다에 도착했는데, 풍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사람들은 얼굴도 없고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일러스트 캐릭터 같았고, 어두컴컴한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광안대교의 불빛, 건물의 불빛, 자동차의 불빛, 뭔지 모르겠는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도 배경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아주 나쁜 사람들만이 알겠지만, 시력이 나쁘면 빛이 굉장히 번져 보인다. 마치 거대한 동그라미 픽셀처럼 보인다.


주변을 돌아보자, 달은 반쪽짜리 픽셀, 해변가의 호텔 건물에 있는 불빛들은 형형 색색의 픽셀로 보였다. 어떤 픽셀은 건물을 따라 내려오기도 하고, 색이 변하기도 했다. 도로 쪽을 바라보자, 흰색 동그라미와 빨간색 동그라미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차였다. 바다 쪽을 바라보자, 주황색 동그라미가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게 뭘까 궁금해서 안경을 잠시 껴보니 어떤 커플이 캠핑 의자에 앉아서 선 폭죽(?)을 사이좋게 돌리고 있었다.


마치 어떤 그림이나 그래픽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흐릿한 시각을 다른 감각들이 도와주는 양, 걸을 때 내 무게를 못 이기고 으스러지는 모래의 움직임, 파도 소리,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는 웃음소리 등 다른 감각이 더 크게 다가왔다.




지난 목요일부터 부산에 내려와 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해서 매년 길게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팬데믹이 길어지자 여행을 못 가는 아쉬움이 컸다. 여러 번 와본 곳이라 일주일을 있으면서 익숙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핸드폰도 없고 안경도 없이 떠난 짧은 바다 산책에서 오래간만에 낯선 기분을 느꼈다.


기술 덕분에 많은 것이 가능해지고 용이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피로도는 높아진 것 같다. 할 수 있으니까 해야 하는 건 아닌데도, 매일 많은 사람들과 이메일, 카톡, SNS 등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있다. 가끔은 그 편안한 혹은 익숙한 연결에서 잠시 끊겨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을 다 속속들이 알고, 선명하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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