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7
오늘 나는 조금 특별한 환자를 맡게 되었다.
할머니는 피아노를 전공하셨다고 했다.
80세가 넘는 할머니가 피아노 전공이라고 하니 신기했다.
성인중환자실에는 아무래도 노인환자가 많다. 매일같이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지만 가끔 그런 분들이 있다. 저 할머니의, 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게 만드는 사람.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노인에게는 그들 각자의 10대와 20대, 30대, 그리고 40대… 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온몸이 아파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지만, 때론 팔다리가 억제대로 묶여있기도 하고 몸에 여러 개의 관이 박혀 있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도 두 다리로 힘차게 뛰고, 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시절이 있었겠지.
문득 그런 센치한 마음이 들어서 할머니는 어떤 노래를 제일 좋아하셨느냐고 물어봤다.
할머니는 쇼팽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내 핸드폰으로 쇼팽을 검색해서 틀어드렸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될 수도 있으니 작은 소리로 틀어서 할머니 귀 옆에 살짝 놓아드렸다.
할머니는 노래가 나올 때 작은 탄식과 함께 곡명을 얘기하시며 해맑게 좋아하셨다. 나는 클래식은 잘 몰라서 그냥 검색해서 나온 곡들을 인기순으로 틀어드렸더니 제일 처음 재생된 노래는 나도 익히 들어본 곡이었다. 아 이게 쇼팽 노래구나. 노래가 좋다,가 아니라 참 아름답다.. 는 생각이 들었다.
요 며칠 병동이 너무 바빠서 나도 늘 바쁘고 힘들었다. 그래서 쉬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었는데, 막상 다음날이 쉬는 날인 것이 아쉬웠다.
할머니는 다른 병동으로 전동 예정이라 내가 다시 출근했을 때 할머니는 안 계실 것 같았다. 이게 할머니를 보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주인공 로즈가 할머니가 되어 젊은 시절을 추억하던 것처럼, 쇼팽을 좋아하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도 뭔가 낭만적인 기억들이 아주 많을 것 같았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겠지.
이브닝 근무가 끝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생전 듣지도 않던 쇼팽 노래를 들었다. 해가 진지 오래되어서인지 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귓가에 흘러나오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 때문이었을까. 어둡고 텅 빈 도로나 길 건너 마로니에 공원, 붉은 건물과 가로수들이 뭔가 사연 있어 보이고 괜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천장을 바라보며 쇼팽을 듣고 있자니 뭔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사실 뒤로 갈수록 점점 모르는 노래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노래가 다 아름답고 그래서 기분이 좋다.
쇼팽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