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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Dec 11. 2024

오늘 나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웨일북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광주 MBC 10년 차 사회부 기자이자 현재는 미국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김인정 작가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취재 이후에 남겨진 것들’ 혹은 ‘뉴스의 뒷면’ 정도 되려나. 저자는 뉴스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재현의 윤리에 관해 숙고한다. 나는 알게 모르게 고통을 전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공익을 위한다면서 피해자의 명백한 사익을 침해하지는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왜 계속하는가,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이 책을 통해 김인정 작가는 기자로 사는 10년 동안 내내 한켠에 품고 있었을 질문을 가감 없이 풀어낸다.     



공감을 넘어 연대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공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이다. 저자는 “특정한 사건에 공감과 연민이라는 감정을 품고 반응하는 행위는 고통의 질서를 때로는 그저 흐트러뜨린다. (148쪽)”고 일갈하면서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을 인용한다.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처음에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공감과 연민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이 아니냐고, 변화를 끌어내기엔 이보다 강력한 동기가 있냐고 말 없는 단어를 대신해 항변하고 싶었다.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뉴스의 현장에서 기자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눈과 귀를 붙잡아두려고 애쓸 때, 뉴스의 수신자이자 소비자로서의 나는 뉴스에 나오는 모든 아픔에 마음을 쓸 수 없다고, 그렇다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거라고 변명하고도 싶었다.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고통에는 그저 슬며시 외면하다 겨우 나와 가까운 사건, 나일 수 있었던 사고에 가끔 마음이 기울 뿐이다. 그러다 저자가 홍콩 시위를 취재하면 느낀 소회를 토로한 부분을 만났다.


독자에게 배달해야 하는 고통이 아주 낯선 것일 때, 어떻게 친숙하게 만들어서 연민과 공감이라는 목적지에 닿게 할 수 있는가. (중략) 그럼에도 그런 기사를 볼 때면 마음 한 부분이 자꾸 긁혔다. 왜 원거리의 고통 앞에 우리가 곧잘 무심해지고 마는지, 고작해야 구경 이상의 관심을 쏟기 왜 어려운지, 친근하게 느껴질 때 왜 연민의 감정이 더 자극되곤 하는지, 왜 너/그들에게 공감하기 위해선, 나/우리와의 연결고리가 매번 필요한지, 바깥의 고통에 대비되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나의 행운에 안도하는 방식이나 우리의 성취를 대조해서 상찬하게 되는 건 지나치게 얄팍하진 않은지, 고민이 됐다. (174~175쪽)     


솔직한 고백에 마음이 움직였다. 한 쪽 눈을 감고 어쩔 수 없다고 하는 나에게 저자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렇다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기 일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게 정말 최선이냐고,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갈 수 있고, 그래야만 하지 않느냐고 독려하는 것도 같았다. 온통 자극적인 뉴스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 거리를 두어야 할 때도 있지만, 나와 닮은 사람을 향한 공감이 자칫 배제를 낳을 수 있다는 통찰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고통은 정말 나와 상관이 없는가      


책을 읽는 중 한 기사를 접했다. 몽골 출신 미등록 이주 아동으로 한국 사회에서 ‘유령’처럼 살아온 32살 강태완 씨가 거주 비자를 얻기 위해 취업한 회사에서 산재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6살에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뒤 26년을 한국에서 정착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 그가 취업한 지 고작 8개월 만에 10t짜리 건설기계 장비와 굴착기 사이에 끼어 목숨을 잃었단다. 평소 같으면 ‘아이고... 또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한숨 한번 쉬고 넘어갔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으며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공감의 울타리를 넓혀보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를 찾으면서 그가 바로 미등록 이주 아동 이야기를 다룬 은유 작가의 『있지만 없는 아이들』의 사례자 인화 씨의 아들 호준(모두 가명)이라 했다. 바로 책을 주문해서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숨어서 숨 쉬고 살아야 돼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이 되세요? 아들이 비자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걸 매일매일 지켜봤어요. 그렇게 장장 25년을 겪었어요. 호준이 한국에 데려온 거 정말 너무너무 후회해요. 이건 사는 것도 아니고 안 사는 것도 아니에요.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내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은유, 『있지만 없는 아이들』, 196쪽)     


어린 아들을 한국에 데려온 것 후회한다는 엄마의 말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이제 아들을 잃은 엄마의 후회가 돌이킬 수 없이 사무칠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더욱 쓰라렸다.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이역만리 외국 땅에 살러 간 적이 있다. 국가와 회사가 보증하는 신분으로 사는데도 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하물며 26년의 세월을 숨죽이고 끝내 사망한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짐작만 해볼 뿐이다.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이 고통은 이제 조금은 나와 상관있는 고통이 되었다. 기사 아래 고 강태완 씨 추모 계좌로 소액의 후원금을 넣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통장에 현금이 모자라 절절매고 있지만 연대의 마음을 보태고 싶었다. 미안함일지, 죄책감일지, 혹은 공명심인지 잘 모르겠다. 뭐라고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반짝이고 찰랑이는 슬픔의 공동체      


고백하자면 이렇게 사회 문제를 다룬 책을 읽고 나면 기운이 빠질 때가 있다. 세상은 빠르게 나빠져 가는데 일개 개인인 나는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에 책을 받고 나서 선뜻 펼치지 못하고 며칠 묵혀두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이럴 때마다 책에서 배운 문장을 기억하려 한다.  

   

비평가 존 버거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37쪽)     


개인으로서 나는 작은 테두리를 넘어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난과 냉소에 자주 기운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는 나를 넘어 공동체를 생각했다. 나 혼자라면 선뜻 읽지 않았을 책을 읽자고 권하는 눈 밝고 속 깊은 동료가 있다는 사실과 이런 책을 함께 읽고 글을 쓰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책 한 권 읽는다고 삶이 바뀌지는 않겠으나 ‘꾸준히, 함께 읽는다’는 것엔 좀 더 의미 부여를 해도 좋지 않을까.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서, 이해로 마음을 집어넣는 일이 쉬워지면, 슬픔을 나눈 공동체를 상상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 (262쪽)” 오늘 나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1166921.html#ace04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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