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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r 29. 2017

구원의 선물

01-어카운턴트(The Accountant)

잭슨 폴락, 자유로운 형태, 1946, 캔버스에 유채, 48.9 x 35.5 cm


개빈 오코너 감독의  액션 스릴러물, <어카운턴트>(The Accountant)에는 그림이 두 점 나온다. 하나는 르누아르의 <양산을 쓴 여인과 아이>(1874)이고, 다른 하나는 잭슨 폴락의 <자유로운 형태>(1946)이다. 이 그림들은 주인공의 별도 은닉처에 보관되어 있는 이동숙소용 차량내에 비치되어 있다.  


영화 제목과 같이 주인공 크리스챤 울프(벤 애플렉 분)는 회계사이다.  그는 범죄집단의 의뢰로 내부 횡령 의혹이 있는 회계장부를 파헤쳐서 이를 확인하고 적발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자폐증이 있으나 대신 숫자에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다. 군인인 아버지는 이 아들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히도록 훈련시킨다. 그는 암흑가의 유력 범죄인들에게 회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청부 해결사 노릇을 하거나 스스로의 자구 수단으로서 살인도 불사하는 냉혹한으로 성장한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명화는 범죄집단을 위한 회계서비스의 대가로 받은 것으로 가지고 있다가 적절한 시점에 처분하여 현금화한다. 르누아르 그림은 차량 숙소 입구 벽에 걸려 있고, 폴락의 그림은 침대에 누우면 보이도록 천장에 붙어 있다. 일을 마치고 잠시 이동숙소용 차량에서 휴식을 취할 때 그는 침대에 누워 폴락의 그림을 감상한다. 그 순간은 어둠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현실과 분리되어 자신만의 내면 세계에 우아하게 침잠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대속의 시공간에 왜 하필 폴락인가. 폴락의 그림은 혼란과 무질서, 자유분방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자폐증이 가지고 있는 편집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다. 그는 식사할 때도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빵이나 베이컨 조각의 위치와 각도가 일정한 방식으로 정확해야만 식사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폴락의 그림을 통해서 무한한 자유스러움을 대리체험하는 것이다. 비록 수수료를 대신하여 받은 그림이긴 하지만 예술을 감상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은 범죄자의 냉혹함이나 잔혹함, 비정함과 대비되면서 그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을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한다.


르누아르, 양산을 쓴 여인과 아이, 1874, 캔버스에 유채, 47.0 x 56.2 cm, 보스톤미술관


한편으로 잔혹한 살상 폭력의 예술화와 대비되어 그림은 일종의 자기파괴적인 주체의 이중성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아이와 여인은 그 자신이자 어머니를 암시한다.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투사되어 심리적으로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초대받지 않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예기치 않는 불상사로 아버지마저 잃게 되고, 어려서부터 유일한 단짝이었던 동생과도 오래전 연락이 끊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는 그야말로 외로운 늑대이다.


평소 아무런 감정적 표현이나 동요도 없이 무감각했던 그의 삶은 새로이 의뢰받은 회계감사 일을 수행하며 만난 회사 여직원 다나 커밍스(안나 켄드릭 분)에 의해 반전의 계기를 맞는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보통때의 업무처리 원칙과는 상반되게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를 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새로운 감정으로서 사랑은 암시만 될 뿐 실제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갈등이 마무리되고 신분노출과 함께 추적을 받으면서 그는 거처를 옮겨 새로운 출발에 나선다. 주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다나에게 그림 액자를 배달시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겉은 다른 그림으로 덧대어져 있던 것을 한꺼풀 벗겨내자 예의 그 폴락 그림이 나타난다.


그녀의 등장으로 보상과 위안으로서의 그림이 더 이상 불필요해진 것이다. 다나가 이를 대체하여 마음 속에 들어서게 되면서 굳이  그림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린 울프를 대신하여 이 그림을 자신의 아파트 벽에 걸어 놓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동숙소용 차량을 몰고 떠나는 울프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떠오른다. 영화 어카운턴트에서 르누아르와 폴락의 그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해 주는 중요한 장치이며, 스토리 전개에서도 두 남녀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을 이어주는 핵심적인 매개고리이다.  


폴락의 그림은 난해한 현대미술의 전형중 하나이다. 멋대로 휘갈겨져 있는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추상미술의 기여점 가운데 하나는 개인화된 그림 해석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특히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상보다는 주체가 더 중요해지거나 강조되었다. 이른바 열린 회화나 열린 예술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울프의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폴락의 그림은 새롭게 출발하는 자신이 다나에게 보내는 구원의 선물이다.

울프에게 "당신 누구에요?"라고 묻고 있는 다나 옆에 르누아르의 그림이 걸려 있다
침대 위 천장에 폴락의 그림 일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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