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시 Mar 23. 2017

시간의 지갑

97-알렉스 카츠

알렉스 카츠, 라운드 힐, 1977, 린넨에 유채, 183 x 244 cm,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라운드 힐은 미국 메인 주의 한 바닷가이다. 말그대로 왼편으로 모래사장을 지나 부드럽게 경사져 올라가는 동산이 그려져 있다.  해변에 다섯 사람이 여름 한철 휴가를 보내고 있다. 화면 가운데 가까이로 한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잡아 그림을 가득 채웠다. 나머지 인물들은 그 사이 좌우나 원경의 빈 곳에 위치해 있다. 시점이 이렇다보니 관람자들은 이들과 함께 해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모델이 되었던 이들은 화가의 가족과 친구들이다. 한 차례 해수욕을 마치고 쉬면서 일광욕중인데, 독서중인 오른쪽 인물이 들고 있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트로이러스와 크레시더>이다. 거기 3막 3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율리우스가 아킬레스에게 말한다. "시간은 뒤에 지갑이 있어, 거기에 망을 위한 구휼금을 고 다니지". 어쩌면 화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빌어 시간이 갖는 망각의 힘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날 해변가에 함께 했던 이들 그날을  억하고 있을까.


화가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 -   )는 지금 아흔살이다. <라운드 힐>을 그릴 때는 쉰살이었다. 그는 아내 에이다를 자신의 모델이자 뮤즈로서 수 십년 동안 꾸준히 그려 왔다. 그녀만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이 그림에서처럼 집단인물화 속 등장인물로도 묘사하였다. 그림에서는 가운데 원경으로 누워 있는 인물이 그녀이다.  일련의 그녀 초상화 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움도 서서히 나이 먹고 있음이 드러난다. 누구보다도 이를 지켜보고 하나하나 그 순간들을 그림으로 남겼던 화가야말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술은 유한한 인간이 시간을 이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은 여름 한철 그때 정경은 물론 해변가의 따갑던 햇살까지도 영원의 순간으로 포착해 사그라들지 않게 만들었다. 한 세기 가깝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에 대해 어느 평자는 시간이 그의 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술가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행운아이다. 잊혀진 예술가도 잊혀진 여인 못지 않게 불행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허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