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알렉스 카츠
라운드 힐은 미국 메인 주의 한 바닷가이다. 말그대로 왼편으로 모래사장을 지나 부드럽게 경사져 올라가는 동산이 그려져 있다. 해변에 다섯 사람이 여름 한철 휴가를 보내고 있다. 화면 가운데 가까이로 한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잡아 그림을 가득 채웠다. 나머지 인물들은 그 사이 좌우나 원경의 빈 곳에 위치해 있다. 시점이 이렇다보니 관람자들은 이들과 함께 해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모델이 되었던 이들은 화가의 가족과 친구들이다. 한 차례 해수욕을 마치고 쉬면서 일광욕중인데, 독서중인 오른쪽 인물이 들고 있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트로이러스와 크레시더>이다. 거기 3막 3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율리우스가 아킬레스에게 말한다. "시간은 등 뒤에 지갑이 있어, 거기에 망각을 위한 구휼금을 넣고 다니지". 어쩌면 화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빌어 시간이 갖는 망각의 힘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날 해변가에 함께 했던 이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화가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 - )는 지금 아흔살이다. <라운드 힐>을 그릴 때는 쉰살이었다. 그는 아내 에이다를 자신의 모델이자 뮤즈로서 수 십년 동안 꾸준히 그려 왔다. 그녀만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이 그림에서처럼 집단인물화 속 등장인물로도 묘사하였다. 그림에서는 가운데 원경으로 누워 있는 인물이 그녀이다. 일련의 그녀 초상화 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움도 서서히 나이 먹고 있음이 드러난다. 누구보다도 이를 지켜보고 하나하나 그 순간들을 그림으로 남겼던 화가야말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술은 유한한 인간이 시간을 이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은 여름 한철 그때 정경은 물론 해변가의 따갑던 햇살까지도 영원의 순간으로 포착해 사그라들지 않게 만들었다. 한 세기 가깝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에 대해 어느 평자는 시간이 그의 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술가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행운아이다. 잊혀진 예술가도 잊혀진 여인 못지 않게 불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