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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y 17. 2017

나무 아래서

102- 케르 자비에 루셀

케르 자비에 루셀, 테라스, 1892년경, 캔버스에 유채, 36×75cm, 오르세미술관


나무 아래에서 할 만한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무 그늘에서 쉬거나 잠자는 것 정도이다. 실제로 나무 아래서 잠자고 있는 걸 그린 장욱진 화백의 <수하(樹下) >란 작품도 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다. 연인을 기다릴 수도 있고, 멀리 장도를 떠나는 아들을 배웅할 수도 있다. 웃자고 하자면 한비자에 나오는 고사성어 수주대토처럼 토끼가 나무에 와 부딪혀 잡히기를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게다. 물론 책을 읽는 것도 포함된다.


때는 가을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엔 책읽기가 제격이다. 한 여인이 나무 아래서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케르 자비에 루셀(Ker-Xavier Roussel: 1867 – 1944 )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이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두 점 더 있다. 하나는 <여인들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테라스에서의 대화>이다. 이들 작품에는 테라스와 가을 나뭇잎, 점박 무늬 패턴의 옷을 입은 여인 등이 모두 같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 <테라스>에는 고립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른 두 작품에서는 여인들이 서로 어울려 이야기하면서 서로 교류하는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같이 등장하는 다른 여인과 서로 무심한 채 아무런 반응도 나누지 않는다. 가을엔 홀로 고독하게 있으라는 뜻인가.


그림의 배경은 튈르리 공원이다. 이 공원은 루셀의 집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건물의 공간 양식이 중세 정원을 연상케 한다.  중세 시대에 폐쇄된 정원은 원죄없는 잉태를 상징하는 우의로 쓰였다. 이는 보호받는 정원에서의 성모자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같은 영적 상징주의는 루셀이 활동하였던 그룹인 나비파에서 어느 정도 수용되었을 부분이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 판화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나무의 모습이나 가지 형태, 나뭇잎의 묘사 등을 보면 더욱 일본화의 느낌을 준다. 그림을 삼분하고 있는 구도도 동아시아 화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장치이다.


그림의 분위기가 나비파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뷔야르와 많이 닮아 있는데, 실은 이 둘은 처남 매부 사이이다.  파리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서로 처음 만났는데, 1893년 루셀은 뷔야르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단조롭게도 보이는 통일된 색조에 힘입어 고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가을 독서에 어울리는 풍취를 전해 주고 있다. 업으로서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무 아래 책읽기만한 창조적 휴식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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