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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냥 Apr 18. 2016

당신에게 보내는 안부 #02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뒤에야 묻는다, 당신의 시간은 어땠는지.

당신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보다 정확히는, 하고픈 말이 많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걸 보고 듣고 마음에 담아 요리조리 뜯어보아야 하니까. 엄마가 겨울이면 푹 고아 주던 곰국처럼 이곳에서의 생활, 그 모든 걸 내 속에서 우려내고 싶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꼼꼼하게 내 일상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던 욕심은, 해야 하는 일을 쫓아 시간에 쫓기는 게 아니라 내가 온전히 나로만 빼곡하게 채워갈 이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물론 그러지 못했다. 첫 안부를 묻는 데만 한 달이 걸렸고 어느새 종강이 불쑥 코앞이고(글을 처음 시작했던 시점에선) 나는 그 세 달 사이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했던 많은 도시들을 다녀왔다. 뿌에르또 바야르따, 과나후아또, 멕스띠까깐, 미추아깐, 산 미겔 데 아옌데, 돌로레스 데 이달고, 멕시코시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에 축축 늘어져서 손가락은 나무늘보보다도 더뎠다. 그래서 나는 첫 안부를 묻자마자 이곳에서의 첫 학기를 마무리하는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 노트북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나는 이 글을 업로드조차 못하고 12월부터 두 달 여행길에 올랐다.)      

한때의 어렴풋한 추억이 아니라 내가 뭘 느꼈고 뭘 생각했고 뭘 당신과 나누고 싶었는지 하나하나 뚜렷하게 전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장소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지금도 희미해지고 있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아마 처음 받았던 느낌을 받진 못할 것이기에 이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나의 멕시코.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했던 것들은 남겨지지 못한 채 날아가 버렸다.      


오로지 내 속에만 잠깐 머물었던 그것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되나. 엄연히 존재했지만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린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 나는 그게 서글퍼졌다. 그것들 하나하나 모여 내가 되었을 텐데 정작 나는 그 하나하나를 조금씩 잊어가고 그리고 그것들을 잊는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거기에 무뎌지고 익숙해졌다. 적어도 멕시코에서만큼은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서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자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비록 그러지 못했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마도 당신을 떠나오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당신이 좋았지만 우리는 함께하지 못했고 그 시간 내내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나와 당신과 그 시간은 무엇이었는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지, 그럼 지금의 나는 뭔지, 그런 답도 없는 질문들을 삼켜낸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속이 허했다. 허겁지겁 채우려 들면 더 허해졌다. 수업, 과제, 리딩, 과외, 학원. 그 모든 걸 꾸역꾸역 죄다 주워 삼켜도 내 속은 여전히 허했다. 걸신들린 사람이 가리는 것 없이 눈에 띄는 모든 걸 제 입에 쑤셔 넣는 것 같은 모양새로 게걸스럽게 시간을 들이켰다. 나는 내가 되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일상 속에서 허한 속을 어찌할 바 모른 채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므로 멕시코로 날아오던 그 비행기에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길 바랬던 것은,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나를 알아가고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기도 했다. 


단단하고, 헤매지 않고, 나아갈 방향이 확실한 그런 사람.     


반 정도는 이루어졌다. 

숨통이 트였고 수능이 끝난 고3 때보다도 더한 시간적 여유에 흐느적거리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머리 굵고 난 뒤엔 처음으로, 찬찬히 들여다 볼 시간을 얻었다. 도망자의 집행 유예는 꽤 달콤했다.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영화에서부터 꽤 사소한 것들까지도. 예를 들어 샐러드에 건포도를 넣는 게 참 내 취향이구나, 하는 그런 사소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텅 빈 속에 새벽을 앓아야 했다. 이따금 홀로 남은 밤이면 아무리 긁어내도 대체 어디서 그렇게 열심히 솟아나는지 모를 초조함이나 좁고 얄팍한 스스로에 대한 갑갑함이 찾아왔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도망쳐왔는데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헤매고,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기가 두렵고, 스스로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오늘은 아침에 샤워를 할지 저녁에 할지 혹은 내일로 미룰지, 그 정도 사소한 결정뿐이다. 다만 나는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당신을 떠나보낸 밤 밤, 그 다음날 제출할 과제를 끝내기 위해 울지도 못하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던 걸 떠올려보면, 외로운 순간 오롯이 외로울 수 있는 것, 헛헛한 순간에 헛헛하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만 가능한 사치이지 않은가. 그 정도에서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한 나는 그럭저럭,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는데

당신의 시간은 어땠는지, 당신의 하루는 안녕한지. 




-


의미부여는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날엔 이것저것 자꾸 덕지덕지 붙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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