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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Mar 31. 2019

근성으로 게이머로 살아간다

1. 참~ 별일 없이 산다.


3월의 둘째 주에는 강남에 신점을 보러 갔다 왔다. 친구 은이가 소개해 준 그곳은, 은이의 친구의 친구인 무당이 하는 곳으로 아직 3년도 되지 않아 무척 용하다고 했다.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뜸 주소를 묻고 예약을 했다. 별생각 없이 가겠다고 했는데 막상 출발하니 꽤 먼 길이었다. 혹시라도 늦으면 실례일까 봐 바람도 무섭게 부는 날 세차게도 걸어 도착쯤에는 땀이 뻘뻘 나 있었다. 다행히 시간은 딱 맞춰 도착했고 무당은 침착하고 밝게 맞이해 주셨다.


점쟁이는 여러 가지 말을 했다. 허공을 걷고 있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늘 외롭고. 인생을 그렇게 살았으니 주위에 남은 사람이 몇 없을 거고 지금 성격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위로인지 비난인지, 충고인지 속 편한 참견인지 모를 말들을 들으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재밌는 시간이었다. 나를 전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나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자세히 말해주고 또 논의하는 점쟁이를 앞에 두노라면, 오랜 친구를 만나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무당이나 점, 사주 같은 것들과 꽤 가까워서 그렇게 놀랍지도 못 미덥지도 않았다. 친가에는 자식 대에 무당이 나오지 않으면 손주 대에 나올 거란 흉흉한 소문도 돌았었다. 물론 고모가 무당이 되면서 나는 그저 흥미롭게 취급할 이야기가 됐지만. 그 외에도 봄바람에도 휘청, 가을바람에도 휘청 거리는 사업가 집안답게 어느 시절에는 부모님이 주기적으로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지난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대박이 날 거란 말에 힘들게 벌인 프로젝트로 큰 적자를 보면서 모두 그만둔지 꽤 됐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미래가 점쟁이 말대로만 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좋은 이야기는 정말일 거라고 믿고 나쁜 이야기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려는 편이다. 

인생은 생각한 대로 되는 법이 없지만, 어쨌든 큰 궤도를 그려놓고 달리면 멀리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는 도착하는 법이니까.


최근에는 인생이 영 혼란스러워, 그렇게라도 생각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도 아침에 눈을 뜰 수도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방학 때부터 한 알바가 화근이었다. 아버지의 회삿 일이니 잘해보고 싶었다. 세상에 못하고 싶어서 시작하는 일이 어디 있으리. 그런데도 나는 사람들이 업계의 기준, 그리고 그 이상이 늘 어려웠다.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분야에서 일하니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것처럼 덜걱거렸다. 끝에는 말도 어눌하고, 몇 마디 핀잔에도 금세 스스로가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회사를 마치고 나올 때면, 허공을 딛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이 세상엔 많고 많은 일이 있다는데 내 자리는 대체 어디 있을까. 

평생 이렇게 못하는 일만 전전하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싶었는데, 톱니바퀴가 되고 싶었는데 사실 무 쓸모 한 조각인 건 아닐까?



그때부터 알바를 갈 때면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사고가 나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나만 죽었으면 했다. 횡단보도를 걷다가 차가 급하게 멈추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지 싶어 아쉬웠다. 수업에 들어가면 친구들이 나만 빼고 행복한 것 같았다. 


강의실에 적어도 1년 이상은 자리할 수 있는 사람들. 부모님이 사장인 기업에서 일하지 않으니, 직접 맡기신 면전에서 실망시키지 않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데 나만 찌그러져 보였다. 전신 거울에 대고 사진을 찍을 때면 내 못생긴 얼굴과 뚱뚱한 다리와 한심한 체구를 보기 싫어 괴로웠다.


허지웅 작가는 인생은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기혐오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했었다. 아마 <별일 없이 산다>에서 였겠지. 밤마다 나를 가누기가 어려워질 때면 나는 그 구절을 떠올리며 버텼다. 사실 죽음은 늘 우리 도처에 있지 않은가. 죽음에는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라 포기가 필요한 것이라서. 인생에 '끝내기' 단추를 누르는 데는 '아 이제 그만할래!'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라서. 


나는 늘 빨리 포기하지 않는 나 자신을 격려했다. 이렇게 몰렸는데, 이토록 별거 없고, 이토록 괴로운데 포기를 안 했네. 굉장해. 세 개중 하나 남은 목숨으로 꾸역꾸역 생명 물약을 먹어가며 엔딩까지 보는 격이다. 시간도 점수도, 내세울 건 하나 없지만 어디 가서 클리어했다고 말하기도 창피하지만 나 혼자서만 은 기념할 만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살아남았고 알바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알바를 그만두니 알바에 대한 우울하고 괴로운 기억은 또 잊히고, 사실 내가 더 노력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자기혐오가 밀려왔다. 이러니저러니 똑같다. 그만두지 않아도 나를 탓했고 그만두어도 나를 탓한다. 이제는 늘 한결같은 나에게 친근감마저 든다. 


더 궁지에 몰리면 죽고 싶고, 사람을 보면 부러워 죽겠고, 만나지 않으면 외로워 말라 버리겠고. 사업상의 모든 프로젝트는 오랜 데이터를 관점을 두고 분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나는 벌써 인생의 절반을 자기혐오로 살아가고 있고 언제든 '아 다 때려치워' 하는 마음으로 취소 단추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누르지는 않는

근성의 게이머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 괴롭지 많은 않다. 삶에는 늘 쉬운 판과 어려운 판이 있고, 어쨌든 늘 풍파가 있으니까.


알바는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일은 계속 도와드릴 생각이다. 내 공부도 글도 함께 하면서. 이십 대 중반이 되면 내 선택을 후회할까?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때도 변명한 말은 있다. 너도 몰랐잖아. 미래에서 과거를 비웃는 것만큼 너무한 일은 없다.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지. 너는 나를 통해 알았기에 그러지 않는 게 아니니? 가끔 우리는 모두 과거에 나에게 빚을 지고 살면서, 저 혼자 큰 것처럼 잘난체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 되었든 올해는 유독 겨울이 길다. 봄옷을 입고 나갔다가 감기 기운에 오들오들 떨며 잠에 들고 있다. 학업이니 일이니 꿈이니 사람이니 하는 것들은 파도처럼 나를 쓸고 간다. 모든 고민의 중심에는 외로움이 있다. 나는 늘 내가 가난하고 하찮게 혼자 남겨질까 봐 무서워 떤다. 




하지만 파도는 막을 수도, 또 이처럼 중심에 서서는 피할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속수무책으로 맞을 뿐이다. 파도도 자꾸 맞다 보면 비처럼 여기게 되겠지. 겨울도 계속 지내다 보면 봄이 오겠지. 

사는 게 그렇지. 죽지만 않으면 계속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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