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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17. 2020

1. 한 짝의 신발,
원래 하나가 아닐수도 있어요

신발파는 마케터의 스타트업 분투기_1


스타트업에 대한 글은 찾아보기 쉽습니다. 마케터와 마케팅에 관련된 글들도 찾아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마케터가 된 신입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같은 시기에 졸업한 동기들은 퇴사 소식만 들리고, 버티는 친구들은 허덕이느라 연락이 없습니다. 


삼년만 버티면 뭐라도 된다는데 삼년 버티기가 어디 쉬운가요.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산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오지만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회사 사람들도 버겁고, 회사의 시스템도 버겁고 뭐 하나 쉬운게 없는 신입들을 위해 이 시리즈를 씁니다. 저 잘 살아 있습니다. 신발 팔면서. 우리 오래오래 버텨요. 





#1


2020.01.14



날이 추우면 신발이 잘 안팔립니다. 왜 우리도 그러잖아요. 날이 추우면 우리 그냥 만나지 말자.그냥 집에서 보자. 우리 방이나 잡자. 하는 말이 아주 쉽게 나옵니다. 사람의 인내심은 한정적이고, 참기 힘든 상황을 견뎌낼 때 아주 빨리 소모된다고 해요.




어떤 연구는 맛 없는 생무를 먹고 수학문제를 풀게 했더니, 안 먹을 때보다 훨씬 못 풀었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도 있죠. 아주 추운 날, 창밖을 보며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까진 괜찮지만 이불과 귤을 벗언나기란 꽤 힘든 일입니다.



물론 겨울이 안 춥다고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닙니다. 기후 학자들은 지구가 10년만 있으면 생명이 살기 힘들어 질 거라고 말하죠. 빙하가 녹아 처음보는 바이러스들이 나타나고, 북극곰도 굶어 죽고, 털신발이 안 팔려 저희도 굶어죽을 지경입니다.



따뜻한 겨울에는 털신발이 안 팔려요. 발이 따뜻하면 땀차서 기분만 나쁠 뿐이니까요. 별로 안 추운날 지하철에 털신발을 신고 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사람은 쓸데 없이 체온아서 높고 숨쉴 때마다 흘러나오는 숨결에 내가 사람인 게 싫어질 지경까지 갑니다.



그렇다면 이런 날씨엔 어떤 신발을 팔아야 할까요. 어떤 신발을 팔아야 우리는 굶어죽지 않을까 고민해보지만, 그건 환경오염으로 당장 지구가 망한데도 심각한 얼굴로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사람들처럼 뾰족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야심차게 준비한 광고는 영 조회수가 나오지 않고, 매출은 자꾸 떨어집니다. 겨울은 뭐 하나 되는게 없습니다.



신발 가게의 보릿고개는 언제일까요. 여름에는 싸게 많이 팔아 먹고 살고, 가을 겨울에는 비싸게 적당히 팔아 먹고 산다지만, 사실 매번 겨울의 끄트머리가 문제입니다. 7월부터 9월까지 적당한 상승 곡선을 그리던 매출은 10월쯤 절정을 찍고 11월부터 쭉쭉 내려가기만 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겨울도 다 끝났는데 겨울 신발은 왜 사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봄은 유독 추우니 갑자기 봄 신발을 사기도 마땅찮죠. 3월까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갈등합니다. 롱부츠는 그럭저럭 잘나가는데 털신발과 로퍼가 함께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어딘가 춥기도 하고 안 춥기도 합니다. 애매해요.

'발은 시려도 마음에 봄바람이 부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하고 로퍼만 올려두면 또 그렇게 잘 나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앵클부츠가 나가는게 무슨 법칙이라도 되나 봅니다.


당연하게도, 장사가 안 된다고 장사를 그만 둘 순 없습니다.


봄 신발은 이미 제작이 끝나가고 있고, 새로운 서비스도 준비중에 있는데 힘 빠져 있을 수는 없죠. 사는게 그렇지 않습니까. 버틸 때까지는 버텨봐야 하고, 아예 굴러 갈 수 없을 때까지는 굴러가야 어디라도 닿을 수 있죠.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는 더 중요하고, 실패하면 실패대로 자료 삼아 미래에 써먹으면 될 일이죠.



지금은 마케팅을 맡고 있지만 검품을 할때도 꽤 있습니다. 오른 쪽에 지울 수 없는 본드가 묻어 한쪽으로 치워뒀는데, 다시 주문했더니 왼쪽이 찢어진 제품이 들어올 때가 있어요. 그러면 보통 '우리가 안 팔린다고 무시하나……' '돌려막기 하나?' 하며 창고로 보내지만, 가끔 한 쪽이 불량이 치워둔 제품에 오른쪽 왼쪽이 문제없이 잘 맞아 하나로 포장해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감쪽같이 하나의 신발이 돼요.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찢어졌다 만나기로 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으면 어쩌면 내 반쪽, 내 짝이란 개념 자체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맞는 반쪽 같은데 어쩌다 잃어버리는 일도 흔하고, 그대로 영영 찾지 못해 평생을 빈 채로 사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죠. 물론 그러다 짝 비슷한 것을 만나 괜찮게 잘 지내는 것도 좋은 일이고요.



애초에 하나로 설계된 신발도 가끔 헤어지는데 혼자 태어난 우리가 잘 맞던 친구를, 연인을 잃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연말, 연초에는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죠. 끝이 가까워 질수록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은 심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그런 기분이에요. 동대문 신발 상가 뒷골목에는 창고가 즐비한데 창고에는 들어가기가 무섭게 나가는 신발도 있지만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지 모를 악성 재고도 많습니다. 가끔은 우리 역시 그렇게 필요없어 잊혀진 악성 재고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요. 시간은 가고 나는 달라지는 게 없고 주위 사람들은 자꾸 바뀌니 문득 '내 인생 어디로 가는거지?' 싶은 두려움이 듭니다.



그럴 때 저는 신발 가게에서 벗어나 파도치는 바닷가를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외로움은 몰려오고 몰려가는데 결국 달 때문입니다 달 때문. 우리 때문은 아니니까 죄책감 가지는 것도 부당합니다. 파도는 달때문에 치고, 해도 달도 지구가 돌아서 뜰 뿐이죠.



얼어죽지 않는다면, 굶어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봄에는 우리 마음에도 봄 바람이 불기를. 신발이 무난히 잘 팔려 바쁘게 일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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