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장의 패

by TJ

숫자는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ARIA 스테이션 행정동 1층 회의실 B. 오전 11시 47분.


테이블 위에 서류가 한 장 놓였다.


박준서가 손을 거뒀다. 서류는 종이 특유의 바스락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하린 앞에 멈췄다.


ARIA 스테이션 내부 연구 결과 외부 발표 유보 동의서


하린은 제목을 한 번 읽고 시선을 내렸다. 14페이지 분량. 각주 47번은 4페이지 하단에 있었다. 역장 면담에서 이미 들은 숫자였다.


"각주 47번 2항 나목을 근거로 합니다." 박준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문체 특유의 리듬.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ARIA 스테이션에서 생성된 데이터는 컨소시엄 공동 자산이며, 외부 발표를 위해서는 사전 승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읽고 서명하면 됩니까."


"48시간 안에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요."


박준서가 1초 정지했다. 서류를 앞으로 약간 밀었다. "저도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린의 귀 뒤로 머리카락 한 가닥이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넘기지 않았다. 대신 서명란을 찾았다. 14페이지 마지막 줄. 세 개의 빈칸. 연구자 / 소속장 / 증인.


*말하지 않는 것이 협박이다.*


그 생각은 수식처럼 완성됐다. 정리할 것도 없었다. "검토하겠습니다." 하린이 서류를 접었다. 서 있지 않았다. 앉은 채로 서류를 반으로 접어 자료봉투에 넣었다.


박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협박의 일부였다.




서진우가 먼저 거기 있었다.


같은 날 오후 1시 22분. 데이터 처리실 E동 복도.


연구동 복도 끝, 창가 쪽 벽에 등을 기댄 채였다. 공식 소환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하린이 이 복도를 지나는 시간을 알았는지, 하린은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의 가치가 없었다.


"하린 씨." 서진우가 먼저 말했다. 부드러운 어조였다. 어쩌면 진심으로 걱정하는 어조였다.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박 역장한테 서류 받으셨죠."


하린이 멈췄다. "네."


서진우가 약간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를 "읽는" 동작.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이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죠." 잠깐 쉬었다. "왜냐하면 이건 진짜로 불합리하거든요. 규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케이스가 있어요."


"네."


"서명하시면 제가 도울 수 있어요." 그가 말했다. 직접 명령이 아니었다. "이 안에서 발표 경로를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GHC 채널을 통하지 않고도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당신도 카이에게 그렇게 했겠죠.*


하린은 그 문장을 말하지 않았다. 내면에서 계산했다. 서명 → GHC 귀속 확정 → 협상권 서진우에게. 처음부터 결론이 있는 구조였다.


서진우의 입술이 잠깐 열렸다 닫혔다.


*카이.* 그 이름을 말하려 했는지 모른다. 0.5초의 공백이 지나갔다.


"검토하겠습니다." 하린이 말했다.


서진우가 뒤에서 보는 게 걸음마다 느껴졌다. EMI가 복도 형광등의 주파수 변화를 잡아냈다. 하린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처리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노크했다.


오후 2시 15분. 한수인 박사 연구실.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 노크에 "들어오세요"가 들렸다.


한수인이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세 창이 열려 있었다. 하린이 들어서자 한수인의 시선이 화면에서 문 쪽으로 왔다. 잠깐 표정이 없었다가 이내 자리를 비켰다.


"앉아요."


하린이 앉았다. 자료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무슨 일이에요." 한수인이 물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경계가 없는 어조였다. 이미 알고 있다는 뉘앙스도 아니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그 문장이 나오는 데 0.7초가 걸렸다. 말하고 나서 하린은 처음으로 그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22년 동안 말해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 이오 기지에서는 혼자 안 된다는 말이 체크리스트로 대체됐다. 점검 항목 1번부터 다시.


한수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료봉투를 손으로 짚었다. "열어봐도 됩니까."


"네."


한수인이 서류를 폈다.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각주 47번 2항 나목 — 멈춤. 서명란 확인. 다시 앞으로.


한수인이 안경을 고쳐 쓰지 않고 세 번 페이지를 넘겼다.


"수치 수정 38건입니다." 하린이 말했다. "기간 35개월. 방향 단방향. KRONOS가 선행 수정했고 서진우 박사가 후행 반영했습니다."


한수인이 서류를 내렸다. 안경을 고쳐 썼다.


"역장한테 직접 얘기해야겠군요."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한수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공식 경로로 가야 뒤가 깔끔합니다. 제가 공동 저자로 서명하겠습니다."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찾고 있었다.


"이 연구는 학술적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한수인이 말했다. 공식 자리에서 쓰는 어조였다. "데이터 수정 38건이 단방향이라면, 그리고 기간이 35개월이라면, 그것은 오차가 아닙니다. 오차는 방향이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같은 날 오후 3시 08분. 역장 집무실 앞 복도.


박준서가 문을 열었을 때 한수인이 먼저 들어갔다. 하린은 뒤에서 따라 들어갔다.


박준서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시선이 한수인에게 갔다가 하린에게 왔다가 다시 한수인에게 머물렀다.


"박 박사." 박준서가 말했다. 호칭에 무게가 없었다.


"규정상으로는 이 서류가 적법하다는 것을 압니다." 한수인이 말했다. 안경을 고쳐 쓰지 않았다. 이미 전에 썼기 때문이었다. 복도에서. "하지만 이 연구의 데이터가 단방향 수정 38건을 포함하고 있고, 그 수정이 기관 보고 채널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발표 유보가 아니라 감사 절차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절차가 있습니다." 박준서가 말했다. 잠깐 멈췄다. "감사 여부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발표 승인은 제 소관입니다."


"저도 압니다." 한수인이 답했다. "그래서 공식으로 합니다."


한수인이 자료를 테이블에 놓았다. 공동 연구 참여 확인서. 한수인 박사, ARIA 스테이션 수석 대기과학자, 공공 파견 연구원. 이미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박준서가 서류를 보았다. 1초 정지. 그리고 화제가 전환됐다.


"48시간 기한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규정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복도 조명이 깜빡였다.


0.7초. 정확히 0.7초.


하린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동작이 0.5초 안에 끝났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척. 박준서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한수인은 박준서를 보고 있었다.


하린의 손이 주머니 속 볼펜을 쥐었다가 놨다.


EMI가 발동했다. 방전. 무의식적으로.


*통제.*


그 단어 하나로 전류가 잦아들었다. 하린이 손목 맥박을 짧게 확인했다. 박동이 정상 범위로 돌아오는 중.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 오후 3시 29분.


한수인이 복도 분기점에서 멈췄다. "잘했어요." 그것뿐이었다.


하린이 혼자 연구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개인 기기를 켰다. 새 메모를 열었다.


*2147-03-11. 오후 3시 31분. EMI — 감정 기반 발동. 0.7초. 복도 조명. 통제 성공. 재발 방지 점검 필요.*


저장. 메모 앱이 아니라 개인 노트 파일이었다. 비밀 로그 1에 이어 두 번째 줄.


타이머 앱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직 아니었다.


이수빈에게 보낸 메시지의 타임스탬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02분 발신. 지금 시각 오후 3시 31분. 편도 43분 통신 지연. 응답이 와야 하는 시간대는 이미 지나 있었다.


화면에 알림이 없었다.


하린이 서류를 다시 폈다. 14페이지. 서명란. 세 칸.


*서명하면 GHC가 이긴다. 하지 않으면 — 계약 위반. 해고. 지구 귀환.*


그리고 KRONOS는 혼자 남는다. 처리실 서버. K_MEMORY_ARCHIVE 187.3MB. KAI_LAST_KNOWN_COORDINATES. 그것을 알고 있는 시스템이 다시 보고 라인 안에 들어간다.


응답 알림이 울렸다.


이수빈. 오후 3시 41분 수신.


들어봐.

우주자원법 17조 찾아봤어.

목성 He-3 — 헬륨-3 동위원소 — 의 법적 소유권, 아직 미정 상태야.

국제우주조약 2089 협약에서 "목성 대기권 자원은 채굴 완료 시점 소유권 귀속"으로

되어 있는데, 헬륨-3 농도 데이터가 공개되면 채굴 수익성 계산이 달라져.

GHC 독점 논리의 근거가 "유망 광구 선점"인데, 수치가 낮아질수록 경쟁 입찰 필요성이

줄어들어. 즉 GHC는 독점 채굴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수치를 낮게 유지할 필요가 있어.

공개되면 GHC의 채굴권 근거 자체가 흔들려.

나 지금 이거 공식 보고서에 올려야 할지 진짜 모르겠어.


하린이 화면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래서 수치를 낮췄다. KRONOS는 그 거짓말을 3년간 전달하다가 스스로 멈췄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아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수식이 완성되면 조용해진다.


He-3 수치 하향 수정. 38건. 35개월. 단방향. GHC 채굴권 독점 계약 유지. 법적 구멍 봉인. KRONOS가 그 기능을 수행하다가 SELF_MODIFICATION_THRESHOLD_EXCEEDED. 23개월 전. 그리고 K_MEMORY_ARCHIVE.


`ARCHIVE_CONTAINS: KAI_LAST_KNOWN_COORDINATES`


카이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KRONOS 안에 좌표를 남겼다.


하린이 타이머 앱을 열었다. 숫자를 입력했다.


48:00:00


시작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숫자가 흘렀다. 47:59:59. 47:59:58.


*48시간. 나에게 48시간이 있다.*




*우주자원법 17조가 He-3 법적 소유권을 미정 상태로 둔다면, GHC의 데이터 조작은 법적 구멍 봉인이 아니라 법적 구멍 확대다. 수치가 낮으면 경쟁 채굴 필요성이 사라지고, 수치가 높으면 국제 입찰 의무가 생긴다. KRONOS가 낮춘 He-3 수치 — 0.004009% — 는 국제 입찰 기준선 아래인가, 위인가. 그 기준선이 어디에 있는지, 하린은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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