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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Nov 03. 2020

1. 늦은 직장생활로 얻은 두가지 감투

2020. 03 정기 인사발령, 그리고 승진.


그리고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 파트장의 인사이동으로 떠밀려 책임자로 오른다. 잠시라도 지금껏 익숙하게 하던 업무 그대로  미끄러지듯 소화하며 월급루팡으로 살아보나 했는데 노는 꼴을 못 보네..


그냥 과장만 달고 싶은데 책임자?....

싫다고 하기엔 쪽팔려서 하긴 해야겠고

(나름 인정받는 걸 좋아하는 타입)

인수인계받을 시간은 모자라 꼬박 한 달을 야근하며 정신없이 내달렸다.


마누라 오는 거 보고 자려고 졸린 눈 꿈뻑이며

산 송장처럼 누워서 기다리던 남편,

퇴근길, 고작 8킬로만 운전하면 되는데, 야밤이라 차도 없고 그저 내달리기만 하면 되는걸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서 갓길에 차를 세워 쉬었다가 가까스로 집에 가는 날도 허다할 정도로 고되고 지쳤던 시간들..


씻고 졸도하면 또다시 출근이라는 한 달 무한궤도가 끝나갈 때쯤이다.


입맛이 없어서 (식탐이 원래 많은 편)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온몸은 매일 두드려 맞은 것처럼 너덜거리고, 늘 입던 옷은 웬일인지 헐렁,, 보는사람마다 수척하다며 날씬해서 부럽다는 개드립을 쳐댄다. (늬들이 대신 좀 해줄래?)


엉뚱한 날짜에 생리통이 시작됐는데 2주째 소식이 없음을 알아챈다. 인수인계를 약 3주의 야근으로 끝내고, 승진과 엮인 책임자 감투를 쓰고는 완벽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느라 나를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하필 생리통이 2주나 가다니,

피곤해서 그러겠거니 라고 넘기기엔 37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인데다, 하필 나와야하는 생리는 안나오고 통증만 지속되서 이걸 먼저 확인해봐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점심시간에 다니던 산부인과로 향한다.


‘여보, 나 지금 병원 가거든 진료 끝나면 밥이나 같이 먹자 나와~’

남편 직장이 코앞이라 요거 하난 좋네






진료 전 브리핑


‘지난달 말쯤 생리를 했는데 갑자기 월초부터 생리통이 다시 시작됐어요. 야근이 워낙 많고 피곤해서 주기가 바뀌나 보나 했는데 통증 있은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는데 안 나와요’


임신 가능성? 부부관계는 지난달 생리 전이었고, 심지어 지난달은 생리도 정상적으로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


주문대로 소변을 먼저 받아왔고, 여전히 내 몸은 녹초 상태라 대기실에 널브러져 있는데 간호사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로 들어가란다.


“축하해요~ 임신이에요!”

네?..(머리가 새하얘 진다)

말도 안 돼요. 지난달에 생리를 했고

지금 생리통이 있는데요?


“그럴 수 있지,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죠?”

3월 20일 경으로 기억해요


“자 초음파 한번 봅시다”

질 초음파, 눈앞에 시커먼 모니터가 켜지고

자궁이라는 우주을 탐험한다


“자 여기 보이는게 아기집이고 자궁 위치 괜찮고, 난황도.. (암튼 이것도, 저것도 다 정상)”

“밖에서 기다리면 간호사가 산모수첩이랑 챙겨 줄 거예요~ 2주 뒤에 아가 심장 소리 들어볼게요!”


무슨 말을 들었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임신이라니..


결혼 이후 지금까지 피임을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임신에 대한 불안감이나 징후도 없었거니와(Hoxy 무정자증 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던 데다,

우리 이번 생은 ‘부모’로 살긴 너무 부족하다 싶어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기로 했었다.

하물며 조카 딸내미 출산이며 돌 선물 챙기면서

내 새끼 꺼는 못 사줘서 서운 타는 엄마한테

할미로 못 만들어줘서 미안하다고 까지 했던

일생일대의 에피소드까지 만들 정도였는데,

임신이라니. 그것도 지금?






산모수첩, 주차별 검진 예정표, 아기 백과사전, 초음파 사진, 등등 한아름을 안고 남편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간다.


여느 때처럼 마누라 기다리며 음식 주문해 두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던 남자는

‘오빠 나 임신이래’를 듣고는

게임하다 나를 보며 동공이 지진이 왔고,

부지불식간에 밥 멍을 때리며(요즘은 캠프파이어에 붙은 불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고요한 상태를 만드는 걸 일컬어 불멍이라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진짜?.... 큰일 났네. 하하. 얼른 먹어, 이때까지 둘이 먹고 놀고 했으면 이제 그만 남들처럼 아기 낳아 키우면서 살아보라고 주신 선물인가 보다”

라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식사를 한다.


우리가 2세를 준비하지 않았던 이유 중

첫 번째,

원하는 걸 다 경험시켜 주고 싶은 부모로서의 욕구를 충족할만한 경제적 여건이 안된다는 것과,

두 번째,

아이를 키우기에 이 세상의 치한이 결코 호락하지 않다는 데서 였다.(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테니까)


피임을 하지 않은 방심에 대한 결과이므로

당연히 우리가 책임질 문제(?)이지만

(뱃속에 찾아온 내 새끼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우리 같은 ‘이왕이면 딩크족’ 부부에게

임신은.. 참말로 당황스럽고, 충격적이라

마냥 좋고 행복해 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오고 가는 외적인 대화 말고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담담해 보이는 오빠 손잡고 걸으며 사무실까지 걷는 내내 마누라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자의 머릿속은 어떨지 문득 궁금해진다.






가족들에게 알렸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소식에

엄마는 혹시나 내가 다른 맘을 먹을까 걱정,

둘째는 기쁨의 오열,

셋째는 새빨간 거짓말로 착각하고,

모처럼 야근을 미뤄 친정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각자 차로 퇴근해서 친정 가는 길.

(마누라의 잦은 야근으로 차 두대 필수)


코로나로 출근하면 상시 회사 출입구에서 체온을 체크하는데 매번 37도를 웃돌아서 열을 식히고 들어가기를 반복하던게 임신 때문이었다니,

입맛없고 쓰러져 잠들던게 임신때문이었다니,

Hoxy 죽을병인가 싶어 대학병원을 가야하나 했던 나의 소박한 고민의 작은 퍼즐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진다.


아직 초봄이라 살짝 차가운 저녁 기운 시원한 바람 쐬려 창문도 다 내려두고, 시선은 앞들 보고 있으나 머릿속은 온통 내배에 품어진 세포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몸살 기운 쏟아지고, 기초 체온은 높아지고, 입맛도 없고, 쓰러지듯 잠만 자고 그랬구나,

좀 쉬엄쉬엄 나 좀 봐달라고 그랬구나..


2020. 계획대로라면,

나는 인수인계 끝나는 대로 다른 요가 워크숍들을 쫒아다니며 더 배우고 수련하며 이번 요가 리트릿은 해외로 가볼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바로 지금부터 이 모든 걸 내려놓고

다른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

“생각 없다더니 어쩌려고 그래”

엄마다운 질문이다

어쩌긴 뭘 어째~ 나아서 잘 키워야지.


이어서 남편도 도착한다.


세상에,

케이크를 사들고 왔다.

내 생일에도 잘 안 사주는 케이크이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질투 난다.

온통 핑크색 범벅인 케이크를 꺼내서 불을 붙이며

 “딸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담백하게 덧붙인다.


임신하고 볼일이다.


그 작은 것이 자리 잡고 둥지 틀려고 그랬다 생각하니 철렁하고, 기특하고, 신비롭고,

세상에 너무 소중하다..


덧붙여,

부모로서의 삶에 대한 갈망이 1도 없던 우리 부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라면 질색팔색 하는 남편이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어서

내심 행복하다.






승진이라는 감투, 꽤나 감격스러웠다.


말하는 재주도 좋고, 사람 상대하는 게 남다르다 싶어서 잘하는걸 무기 삼아 금융업계 Sales에서 영업사원으로 8년을 일했고,

자연스럽게 관심 가던 내근직 티오에 나도 입사지원서를 넣을 기회를 달라고 했으며,

결과는 좋았다.


뽑을 사람이 없어, 지원자가 너밖에 없어, 등 뭐든지 간에 상관없었다. 회사가 날 선택한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나는 33살에 뻔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파이팅 넘치는 나의 조동아리는 꽤나 빛을 발했고,입사 2면 반 만에 ‘과장’이면 괜찮지 아니한가?


무슨일을 하든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아하게 걷는 때는 반드시 온다’고,

어디서든 고민만 하고 있을 중생들에게 뭐든 일단 욕심나는 건 당장 시작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과장을 달고 한 달 만에

임신 사실을 회사 전체에 알렸고,

상승 가속이 붙을 것만 같았던 회사생활은 잠시 묻기로 한다.


그래,

이제부터 워킹맘 과장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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