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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Apr 16. 2024

나는 내가 오늘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계속.

잊지 않기 위해 쓰는 10년 전 4월 16일의 기억

어떤 삶을 살아야 기만이 되지 않을까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삶은 채 단단해지기도 전에 이미 잔뜩 짓무른 채였고, 숨을 쉴 때마다 생활의 악취가 풍기는 것만 같았으며, 머무르는 자리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에 대한 지겨움이 혼재된 고름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일을 시작했고, 인턴 기간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출근과 교육, 현장 취재와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게 되면서 내 우울과 삶에 대한 끝없는 비탄은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흐릿해졌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눈코뜰 새 없이 바쁘면 정말 우울할 틈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 시기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날은 아직도,-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스포츠 기자로서 3년차, 겨우 주니어 딱지를 떼고 한 사람 몫을 할 듯 말 듯한 시니어의 스텝에 올라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아둥바둥하던 해였다. 기깔나고 날카로운 분석 기사를 쓰기에는 깜냥이 부족하고, 친분을 앞세워 단독을 따내기에는 내 노력으로 가져올 수 없는 더 많은 종류의 것들이 부족한 때였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인터뷰에 매달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현장에 나가면 믹스트존이든 기자회견장이든 어디든 누굴 붙잡고 한 마디라도 해보려고 안달복달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제법 열심히 기자일을 하려고 노력하던 시절. 그런 시절의 봄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지하철 1호선을 타고 1시간 넘게 실려가, 거기서 또 택시를 타고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역 앞에서 잡아탄 택시는 담배냄새가 조금 났고, 아저씨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무심하게 목적지를 물은 뒤 어떤 잡담도 없이 앞만 보고 운전에 전념하셨다. 뒷좌석에서 바라본 아저씨의 오른쪽 귓바퀴와 백미러에 걸려있던 부적 비슷한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이구 저런, 배가 가라앉았대요."


노트북을 꺼내 질문지를 체크하고 있는 도중 들려온 아저씨의 말에 나는 문득 창밖을 쳐다봤던 것 같다. 숙소 도착까지는 한 5분 남짓이나 남았을까. 나는 택시 아저씨의 스몰톡이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그래요? 무슨 배요? 따위의 대답을 대충 해대며 질문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라디오 볼륨을 조금 더 크게 키웠다.


"전라남도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좌초했습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세월호에는 476명이 승선..."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단정했고, 신호를 한 번 넘긴 택시는 갓길 같은 산길을 올라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카드를 내밀어 결제를 마치고, 뉴스를 끝까지 듣지 못한 채 가방을 챙겨 내려서 사진기자 선배를 기다리며 흙바람 휘날리는 숙소 앞을 마냥 배회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한 번도 스마트폰을 열어보지 않았다. 


선배가 도착하고, 인터뷰를 위해 홍보팀장이 우리를 데리러 오고, 선수들 점심시간이라 조금 기다려야 하니 식사라도 함께 하자는 말에 물흐르듯 이끌려 구내식당에 앉았을 때. 가정집 식탁 같은 촌스러운 핑크색 체크무늬 식탁보와 한식 뷔페마냥 세팅된 집밥 같은 반찬들을 조금씩 집어와 어색함 속에서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을 때.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은 길쭉길쭉한 배구 선수들이 두 팔로 머리를 받친 채 바라보던 TV 속 뉴스 화면에 세월호가 크게 잡혔다. 자막에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 구조"'라고 쓰여 있었다. "죽은 사람 없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택시타고 오는 길에 저 뉴스 봤는데, 그래도 다 구했다니 잘 됐네요."

"타이타닉 시절도 아니고, 요즘 배 가라앉는다고 사람 그렇게 안 죽죠~ 그래도 수학여행 간 애들도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홍보팀의 누군가, 그의 대답에서는 자녀가 있는 사람 특유의 공감이 배어났다. 저 배에 타고 있을 애들 부모는 또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런 행간이 저절로 읽히는 말투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전원 무사 구조, 다행이다, 그렇게 마무리하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터뷰를 위해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사진을 위해 배구공을 이리저리 세팅하고, 중간중간 공을 쳐넘겨주기도 하고, 코트 바닥에 앉아서 준비해 온 질문지를 바탕으로 40분 넘게 이야기를 나누고, 녹취 파일이 제대로 담겼는지 확인하면서 일어나 나보다 훌쩍 크고, 나보다 훨씬 어린 선수와 악수를 하고 헤어지고. 홍보팀 차에 실려 다시 역까지 돌아와 기사 잘 부탁한다는 인사로 헤어진 뒤. 머나먼 전철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담배 한 대가 간절해져 역 근처 뒷골목에 숨어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스마트폰을 켜 포털 메인을 확인했을 때.


나는 우리의 삶이 기만이 되는 순간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의 삶이 불합리하고 기만적인 토대 위에 위험하게 버티고 서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원 무사 구조', 그건 내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 모든 거짓말 중 가장 질이 나쁜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나는 필터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불을 바라보다가 다시 스마트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계속 갱신되는 기사들은 맹물로 끓이는 국 같이 희망적인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릴 때이기는 하지만,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고 지하철 화재가 일어나는 그 모든 뉴스들을 빠짐없이 봐왔는데도 이날의 기억과는 또 달랐다. 현실이 순식간에 빛과 색을 잃는 경험을 그날 처음 해보았다. 


그리고 몇 주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안산을 연고로 창단한 러시앤캐시 취재 때문에 상록수체육관을 찾았다. 상록수역 앞에는 노란 리본이 흐드러지게 걸려있었다. 그건 기묘한 뒤틀림이었다. 평범하게 거리를 걸어다니고,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먹고, 마을버스를 타고, 배구를 보러 와 응원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그 때만큼은 색을 잃고 회색빛으로 바래있었고 오직 그 노란색만 선명하게 여기저기 떠올라있는 풍경. 도시는 눅눅하게 젖어있었고 동시에 완전하게 탈수되어 있었다. 상록수체육관에서 단원고까지는 차로 20분 남짓이었다.


요즘도 가끔, 배구를 보면 나는 그날의 한전 숙소 내 체육관과 안산 상록수체육관이 생각난다. 기름칠이 된 오래된 코트 위로 통통 튀며 굴러가던 배구공 소리, 아빠 손을 잡고 경기장에 따라온 초등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꼬마가, 환호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어려워하며 새된 소리로 내뱉던 응원소리,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토록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여전히 나를 부끄러워하던 10년 전의 나로 되돌아가고 만다. 잘난 척 떠들고, 기사를 쓰고, 뭐라도 된 것마냥 인터뷰를 하고, 술을 마시면서 인생을 논하고, 더 나아가 어떤 삶을 꿈꾸겠다 미래를 그려보겠다 바라는 내 당연한 욕망들이 그날, 전 국민이 경험한 그 무력감 앞에 내던져지는 순간 나는 뼈저린 고통에 시달린다. 그날의 희생자 중에 연고가 있어서도, 그 사건이 일어난 곳에 방문한 경험이 있어서도, 내 다른 많은 동료들처럼 그 사건을 취재하며 연관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그날 그 시간에 살아있었고, 지금도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4월 16일의 무력감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전, <컴프롬어웨이> 리뷰를 쓸 때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사견이지만, 오히려 ‘컴프롬어웨이’는  9·11 테러라는 거대한 사건이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미시적으로 조명한 극에 가까워 보인다. 9·11 테러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피해자와 그 슬픔의 정도를 비교할 수야 없겠으나, 이토록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도 이전과 같은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열 번째 4월 16일이 되어서야 나는 이 문장이,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가라앉는 세월호를, 잔인하게도 모든 것이 발가벗겨져 송출되는 이 미디어 환경 속에서 그저 무력하게 모든 과정을 목격해버린 우리는 이전과 같은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꾸준히 기억하고, 꾸준히 떠올리며 이 전 국민적인 PTSD를 치유하기 위해, 내 삶이 기만이 되지 않기 위해 계속 싸울 수 있는 의지를 갖기를 바란다. 언제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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