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5분 남짓 걸어오는데 땀이 펑펑 솟는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외부 테라스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몇 번 한 뒤, 시계를 확인하고 아직 출근 시간까지 20분 가량 남았음을 확인한 다음 부채를 접어 가방에 넣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빌딩 사이로 1/3 정도 보이는 부채꼴의 하늘은 높고 파랗고 무자비해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를 모두 태워버릴 것처럼 타오르고 있다. 아직 6월 중순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고 있다. 버드나무 같이 가녀리고 그러면서도 휘둘러지기 좋은 문장들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문장은 아닌데도 그 문장에는 힘이 있어서 저 멀리 떠나갔다가 내게로 돌아오는 반동으로 나를 아프게 후려친다. 공연예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는 첫 머리부터 그의 문장에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아프게 얻어맞았다. 그건 분야를 떠나 누구에게나 그렇게 느껴질 만한 통찰-이라기보다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존재하는 공감-인데, 비슷한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자 유사한 산을 여러 개 쌓아올리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마음 바쁘게 느끼는 어떤 채무감에서 비롯하는 감상이기도 하다.
30대 초반까지의 나는 '삶을 방기하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나는 늘 조바심에 가득 차 있었고 뭔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텅 비어있는 시간들을 견디지 못해 늘 '해야만' 하는 것들을 그 빈 공간에 꾸역꾸역 채워넣었다. 지금도 그 습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결국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뎌진 나의 마음일 것이다. 나는 요 근래 몇 년, 내 삶에 가편하기를 포기한 채 '방기하는 것조차 방기한 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돈이 되지 않는 글은 쓰지 마라'는 직업적 삶의 철칙과, '좋아하는 것이라면 돈에 연연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써라'라는 영적 고통의 계율 사이에서 꽤 많이 흔들렸다. 내 글은 보이지 않는 빨간 선이 쳐진 가상의 원고지 위에서 신문용 언어로 다듬어지고 삭제되고 깎여나가 돈으로 환전되었다. 200자 원고지 10매 내외, 200자 원고지 25매 내외, 5단 박스 하나, 1면 톱 2800자 분량. 3면에서 이어집니다. 그런 언어들이 내 글을 반듯하게 자르고 다듬어 붙인 뒤 예쁘다기보다는 단호하고 힘있게 치장했다. 그게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문제는 그렇게 매일 글에 연미복을 입히고 커프스를 달아주고 꼬리깃이 잘 빠졌는지, 먼지가 묻지는 않았는지, 어딘가 솔기가 튿어진 곳은 없는지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내 안의 투박하고 못생기고 저열하고 끔찍한 글들이 어딘가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다시는 기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는 점에 있다. 서툰 글, 가치를 인정 받아 돈으로 환전되지 못할 것 같은 글, 어딘지 모르게 유치해보이는 글, 혹은 반대로 멋을 잔뜩 부려 누가 보더라도 비웃을 것만 같은 글,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는 글, 반대로 꼬리만 있고 머리가 뭉개진 글들이 하나둘씩 내 안에서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생을 유예해 온 건지도 모른다. 부채를 접어넣고 스마트폰의 앱을 켜서 '언젠가 써야지'하는 마음으로 조각조각 저장해놨던 문장들을 몇 개 훑어 읽었다. 대체 이걸로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도통 모르겠는 엉뚱한 문장도 있고 지금 다시 손을 대면 이런 반짝이는 느낌은 절대 내지 못할 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도 있었다. 한 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부끄러워서 그대로 삭제할 뻔한 문장도 있었고 맞춤법이 틀린 글도 있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쓰지 못한 글'이라는 점에서 내가 유예해 온 시간들의 압축 같았다.
써야 할 글들이 많다.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절이 오면 나는 늘 반쯤 제정신이 아니게 되므로, must be와 have to의 사이에서 의무와 책임을 손빠르게 쳐내버리고 아무런 돈도 되지 않는, 세상에 제대로 나오지 못해 잊혀질 일조차 없는 글들을 잔뜩 쓸 것이다. 아직 6월 중순밖에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