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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Feb 13. 2022

추워질 때면 차가운 바람에 실려 기억이 나는 노래

낡고 좁은 집, 그리고 김추자의 마른 잎

사람들은 나에게 음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내가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남에게 내 취향의 음악을 소개하는 걸 좋아했다. 또한 그 음악을 칭찬하는 타인의 얼굴을 보는 걸 즐거워했다. 뜨거운 책상 스탠드와 모니터 불빛에 얼굴이 달아오르던 늦은 밤,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나에게 메신저 하나가 도착했다. “지금 듣기 좋은 곡 좀 추천해줄래요?” 함께 저녁을 먹었던 동료 하나가 보낸 메시지였다. “김추자 – 마른 잎, Blood orange- Free town sound 앨범을 들어보세요.” 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아티스트의 이름을 적어 보냈다. “김추자? 바이닐 레코드 페어에서 엄청 비싸게 팔던데. 이런 곡도 들으세요?” “우연히 알게 됐는데 좋더라고요.” 내가 김추자를 알게 된 건 잠시 살았던 주택의 옆집 할머니의 취향에서 비롯됐다.


추위에 해조차 몸을 숨겼는지 빛 한 조각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겨울의 낮이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온몸을 웅크리고 대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때 내가 살던 집은 주택의 1층으로 한 할머니의 옆집이었다. 그 집은 항상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한 밤처럼 어두운 집의 가구들은 연필 밑그림처럼 연하고 흐리게 보였고 그 앞에 놓인 백발의 노인 또한 존재감이 없었다. 그녀는 안을 힐끔 바라보는 나의 등장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시계의 추처럼 무겁게 얼굴을 양 옆으로 흔들었다. 그녀의 곁에는 뜯어진 맥심 인스턴트커피 봉지 2개와 빨간 꽃이 인쇄된 유리컵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의 집 안 어딘가에선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는커녕 그 노래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고요한 노인 곁에 흐르는 어느 여가수의 구슬픈 목소리는 어두운 이 방이 만들어낸 유일한 소리였다. 어느덧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의 존재감이 어찌나 작은지 그녀가 기침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할머니가 그 집의 가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종종 음악을 틀어 놨던 노래는 알 수 없는 엔카, 그리고 오래된 대중가요 등이었다. 그중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곡이 김추자의 마른 잎이다. “마른 잎 떨어지네 길 위에 구르네 바람이 불어와 갈 길을 잊었나.” 언제나 그렇듯 창문을 힐끔이며 지나가던 나의 귀에 남은 가사 한 조각. 후에 인터넷에서 김추자 이름과 가사를 적어 검색해보니 그 곡은 ‘마른 잎’이란 노래로 1975년에 발매된 곡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고 그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녀가 취향 것 틀어놓은 곡들 날이 추워질 때면 차가운 바람에 실려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취향에 물든다는 건 항상 우연히 다가온다. 좋은 게 좋은 거란 말처럼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음악에 이유를 붙이지 못하겠다. 몇 년 전까지 나는 남에게 내 음악적 취향 소개하길 즐겼지만 사실 나의 취향이란 것은 어떠한 이유가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흘러들어온 음악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닫곤 좋아하는 노래에 더 이상 이유를 붙일 수가 없다. 한동안 음악 이야기를 하며 친구들과 밤새우던 날들이 있었다. 서로의 취향과 지식을 뽐내고 이야기하며 이 곡의 위대함, 아름다움, 가사의 섬세함과 밀서처럼 알려지지 않은 의미에 대해 언성을 높여 상대를 설득했다. 지금은 오히려 좋은 음악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머릿속에 쌓인 곡은 매년 빼곡히 늘어나지만 시간이 흐름에서 오는 편협하고 견고한 취향이 아닌, 타인의 취향을 함부로 입에 가볍게 올리지 않게 된 거라 생각한다.


오늘 문득 오래전 살았던 낡고 좁은 1층의 집이 가끔 떠오른다. 2층에 살던 6남매의 쿵쾅이는 발소리, 어둡고 습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낡은 가구 같은 할머니가 듣던 김추자의 '마른 잎'. 오늘은 그 노래가 떠오르는 걸 보니 몸 혹은 마음이 추운가 보다. 따뜻한 모포를 몸에 감고 하루를 마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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