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ther Jul 20. 2021

소설 '슬픈 짐승'-사랑, 그 뒤에 남겨진 음악들

모니카 마론'슬픈 짐승' Playlist. 레드 제플린, 김사월, 정우

모임의 두 번째 시간, 우리는 모니카 마론의 책 '슬픈 짐승'을 함께 읽고 찬란했던 사랑과 그 뒤에 남겨진 달콤 씁쓸한 음악들을 곁들였다.

'슬픈 짐승'은 하나의 슬프고 지독한 사랑이 시작되고 고독 속에 비참하게 끝나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5~6년 전 즈음 처음 읽고 꽤 오랜 시간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었다. 이토록 상처부위를 긁는 듯 괴로운 사랑이라니. 나는 읽는 내내 한숨을 쉬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안타까움 속에 읽어 내렸던 기억이 난다. 소설 속 사랑은 사랑의 주체를 잡아먹고 슬픔의 겉가죽만을 뱉어두었다. 이 읽기 힘든 책을 모임의 두 번째 주제로 소개하기까지 처음엔 많이 망설였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이 어둡고 무거운 책을 읽는데 힘들어하지 않을까란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과 책, 영화 모임이긴 하지만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스트레스 없이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호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슬픈 짐승'을 선택했다. 사람들의 운명 같은 이끌림, 기억에 남는 이별에 대해 듣고 싶었고, 지독한 사랑을 떠올렸을 때 각자가 생각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임 당일, 15명의 멤버 중 4명만이 책을 읽었고 반은 아쉽지만 여러 직장인의 바쁜 사정으로 읽지 못했다고 했다.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이 책은 너무 비참해서 읽고 있는 내내 마음이 힘들었다.', '이런 사랑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 '문체가 너무 아름답다. 하지만 내용은 무겁고 슬픔으로 가득 찼다.' 

다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숨을 깊게 내쉬며 읽은 모습이 역력해 이 책을 선택한 게 조금 미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읽어낸 책에 대해 읽고 오지 않은 이들에게 눈을 빛내며 설명했다. 그리곤 "힘들지만 앞으로 가끔 사랑이 힘들 때 생각날 책이에요."라고 누군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 날 나는 '슬픈 짐승'과 함께 멤버들에게 들려줄 곡들을 아래와 같이 선곡했다. 


Led Zeppelin  - The rain song

김사월 - 확률 

정우 - 연가

선우정아  - 동거 

Jeff Buckley - Lover, You Should've Come Over


첫 번째 음악은 찬란한 사랑의 기원을 찾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The rain song을 함께 들었다.

지미 페이지의 손끝에서 기타음이 빗소리처럼 튕겨 나온다. 이 비는 한여름의 태풍이나 장마도, 겨울의 차가움도 아니다. 기타 소리에는 봄날의 생명을 깨우는 따뜻한 두드림, 초 여름 햇살을 식히는 다정함, 가을과 겨울 사이 계절의 변화를 안내하는 상냥함이 녹아있다. 이 비는 무수한 형태의 감정이 모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당신과 나에게 젖어들고 있다. 

 슬픔이 잉태되기 전 피어난 사랑의 기쁨과 경이로움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반가운 빗소리 같다.  

Led Zeppelin  - The rain song



제 나이를 모른 체 자신이 백세쯤 되었다고 생각하는 '슬픈 짐승' 속 늙은 여자는 하루하루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을 살아간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로 죽음이 곁을 드리운 이후로 자신의 인생에서 놓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일 년 후 그녀는 프란츠를 만난다.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했던 그녀는 브라키오사우르스의 뼈대 앞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그는 브라키오사우르스와 그녀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동물이군요."라고 말했고 그 순간 '프란츠'는 그녀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록된다. 프란츠의 담회색 눈동자에는 브라키오사우르스와 그녀가 담겨있다. 수억 년 전 이 지구를 지배했던 포식자의 흔적, 긴 시간 형체를 보존해온 위대하고 아름다운 뼈. 이 거대한 공룡이 멸종되고, 어느덧 지구를 지배하게 된 사람들이 그 포식자의 뼈를 바라보는 것처럼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과 감정이 그와 그녀 앞에 선다. 


어느덧 늙어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는 이미 놓쳐버린 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프란츠와의 시작을 떠올린다. 그 시작은 마치 계절을 변화시키는 비처럼 그녀의 삶을 변화시켰다. 레드 제플린의 The rain song은 그녀를 한순간에 적셔버린 사랑의 감정에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슬픈 짐승(Animal triste ), 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 책 제목은 '섹스가 끝난 후 인간은 슬프다'라는 관용구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사랑이 끝난 후 밀려오는 허무감과 슬픔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뿐일까? 자신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와의 사랑만을 기억하고자 수십 년간 스스로를 고립시킨 그녀의 삶에 이토록 어울리는 문장이 또 있을까 싶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 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녀의 사랑은 이 세상 몇천 몇만 분의 확률 속에 가녀린 희망처럼 피어났다. 동독 출신의 고생물학자인 그녀는 서독 출신 연구가 프란츠를 공룡의 뼈 앞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이미 가정이 있다. 책의 서문을 읽는 순간 이 것은 가망 없는 사랑이었고 종결된 사건, 병으로 죽어버린 관계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병은 불치병으로 영원히 그녀를 저항할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만든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이토록 간절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병든 삶의 치유보다 그 병 속에 자신을 안락사시키길 택할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김사월의 '확률'이란 곡을 떠올린다. 나는 두 번째 플레이리스트로 이 곡을 선곡했다. '너의 얼굴 만지고 너의 이름 부르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하지만. 너무 오래전에 끝난 내가 만들어낸 사랑.' 김사월의 노래 속 화자 역시 헤어진 후에도 나의 여생을 함께할 확률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 떠난 사랑을 지칭한다. 소설 속 그녀의 삶에서 프란츠는 떠나갔지만 그녀의 여생을 죽음까지 함께할 사람은 오직 '프란츠'인 것과 같다. 김사월의 담담한 목소리는 소설의 깊은 슬픔을 한껏 크게 증폭시킨다. 노래 속 완벽히 튠하지 않은 떨림과 엇나가는 목소리의 음은 평생 당신을 기억하고자 애쓰며 가냘픈 사랑의 끈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듯한 떨림이 느껴진다. 


김사월 - 확률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가 곧바로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받았던 무한한 애정과 축복. 그것은 남은 우리의 인생에서 애정을 갈구해야 할 비참한 순간이 많음을,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상처의 완충제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프란츠를 만나기 전 노멀 그 자체였던 그녀의 삶은 프란츠를 만난 이후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기억을 잃어버린 노년의 그녀는 자신의 딸과 남편이 자신을 어떻게 떠나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프란츠에 대해선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녀의 사랑은 미쳐 날뛰며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였으나 슬프게도 다시 문 안에 갇혀버린다. 앞으로 그녀는 오직 프란츠만을 기억하고 집착하는 외로움이란 감옥 속에 평생을 살아야 한다. 프란츠는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끝나지 않는 중단 없는 사랑 이야기 속에 그와의 사랑만을 끝없이 반복해서 재생하고 재생한다. 그는 떠났지만 그녀의 사랑은 사십 년이 지나고 오십 년이 지나 자신의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어진 상태에 와서까지도 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마지막 연인, 그 남자 때문에 나는 세상을 등졌다. 나를 떠났을 때 그는 안경을 잊고 내 집에 두고 갔다. 나는 몇 년 동안 그의 안경을 썼다. 건강하던 내 눈을 그의 근시와 뒤섞어 흐릿한 눈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서, 울타리와 범죄자 자동차 중간에서의 나의 우연한 죽음이 프란츠에 대한 나의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 ‘


이 소설에 어울리는 세 번째 플레이리스트로 정우의 '연가'를 선곡했다. '슬픔 짐승' 속 그녀는 베를린 장벽이 그들을 만나게 하기 위해 무너졌다 생각했다. 그가 부인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미행하고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가 여행을 떠난 내내 혹시라도 그의 전화가 올까 집을 비우지도 않았다. 그가 머물 것이라 추정되는 호텔마다 전화를 돌렸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 그녀는 죽음에 이르는 지독한 집착에 빠졌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고 넝마 같은 그들의 관계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 후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그들을 만나게 했지만 사실 그녀는 무너진 장벽, 부서진 돌처럼 무참히 파헤쳐지고 버려졌을 뿐이다. 

'벌어진 그날을 붙입니다. 네가 아프고 힘든 사람이래도 나는 곁에 앉아라. 이제 널 안고 그 무렵을 내려놓고

어깨에 힘을 풀고 숨 들이마시고. 눈 감지 말고.' 

정우의 연가 역시 이미 떠나간 사람을 붙잡고 있다. 접붙이지 못할 끝난 사랑을, 넝마 같은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기억 속에서 꺼내어진 닳고 닳은 그녀의 사랑 같다. 


이제 널 안고 그 무렵을 내려놓고

어깨에 힘을 풀고 숨 들이마시고

눈 감지 말고

넝마 같은 당신을 붙입니다

떨어진 마음도 줍습니다

당신 좋은 사람이 아니래도

나 멋대로 실망하지 않아요

넝마 같은 우릴 여밉니다

벌어진 그날을 붙입니다

네가 아프고 힘든 사람이래도

나는 곁에 앉아라

이제 널 안고 그 무렵을 내려놓고

어깨에 힘을 풀고 숨 들이마시고

눈 감지 말고


정우 - 연가


정우 - 연가 


PS. '정우 - 연가' 영상은 Stage&FLO : Hongdae 100일 100명의 인디 아티스트 공연 영상으로 나는 전체 프로젝트 기획과 아티스트 섭외를 진행했다. 정우씨는 음원보다 라이브가 더더더 좋다. 

문토 모임 날 멤버들과 이 영상을 함께 보았는데 훗날 많은 분들이 정우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키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속 재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