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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18. 2022

부산에서 일주일

명절의 기억과 안은미, 백현진, 김오키씨의 공연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우리 가정은 불행보단 금전적 불우함에 가까웠다. 나의 기억은 초등학교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이전은 안 좋은 기억, 부끄러운 기억, 힘들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신기하게도 역시나 힘들었던 시절이 많았지만 그 후론 좋았던 기억만이 두텁게 추억이란 예쁜 이름으로 포장돼 있다. 그런 행복했던 기억들의 편린들이 우리를 불행함보단 좀 더 행복한 가정과 닮았을 것이라 믿게 하고 나를 지탱시킨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순간, 네발 자전거가 아닌 두 발 자전거로 땅 위를 어설프게 달렸던 첫 순간. 한 친구는 아빠가 처음 네발자전거의 바퀴를 때어 주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또 다른 친구는 엄마 아빠가 잡고 있어! 잡고 있어!라고 말했지만 사실 혼자 바퀴를 힘차게 밀어내고 있었던 순간의 환희를 떠올렸다. 나의 첫 두 발 자전거 경험은 윗집 아주머니와 함께였다. IMF 이후 회사를 실직하고 가게 장사를 시작한 부모님은 늘 바빴고, 나는 혼자 자전거 연습을 했다.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 홀로 자전거 연습을 하는 어린 나를 자주 발견한 아주머니는 나의 보조바퀴를 제거해 주었고, 두 발 자전거를 내 뒤에서 힘껏 밀어주었다.  

"아줌마 잡고 있어! 그냥 앞으로 가!"

그것은 내 첫 도약이었고, 비틀비틀 넘어질 듯하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지금의 나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추석과 설날, 대보름 등의 명절은 너무 바쁘고 힘든 날이었다. 남들처럼 전을 부치고, 송편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우리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는  늘 명절이 바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단단하고 고소한, 뜨거운 두부를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했다. 탕국, 두부 구이, 톳나물 무침 등 명절날 두부의 쓰임은 몇 배로 증가했고, 나는 부모님을 도와 밤늦은 시간까지 두부를 판매하고, 물건을 날랐다. 이때 나의 동지들이 있었으니 부모님이 떡집을 하는 열리, 생선가게 아들 은수였다. 은수는 친하지 않았지만 나의 부모님은 언제나 성실한 은수를 칭찬했다. 떡집 딸인 열리와 나는 지금도 만나면 그때의 고단함을 이야기한다.

"명절엔 정말 바빴어. 남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물건 나르고, 계산하고의 무한 반복이었지. 뜨거운 두부를 나르다 보니 손엔 늘 작은 화상을 달고 다녔어. 나중엔 계산이랑 봉지 끝을 뱅글뱅글 돌려 묶는 게 도가 텄다니까."

"설날 떡국떡은 왜 이리 팔아도 팔아도 끝이 없는지..."

"그래도 명절 후에 네가 가져왔던 고구마 양갱 정말 맛있었는데 기억나? 난 어쩌다 명절에 장 보러 나온 반 친구를 만나면 부끄러워서 창고에 숨고 그랬는데. 왜 그랬는지 몰라."

갓 나온 두부는 참 맛있었다. 간장이나 참기름만 살짝 부어 그 자리에서 바로 먹으면 고소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몇 년을 네모난 두부에 시달려 물릴 만도 한데 아직도 두부를 좋아하는 걸 보면 내 입맛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제일 강하고 단단한 것 같다.


부산에서의 며칠은 아빠를 작은 방으로 쫓아내고 침대 엄마 옆자리를 내가 차지했다. 엄마와 손을 잡고 이것저것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엄마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잠이 들었다.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엄마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 시끄러워 잠을 자지 못한다고 화를 내곤 했는데, 이번 주는 조금 달랐다. 혹시 코 고는 소리에 내가 잠을 잘 자지 못할까 봐 선잠을 자며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금세 깨어나 "아직 안자나?"라고 묻는 엄마. 한참 불면증에 시달렸고 지금도 규칙적으로 잠들지 못하는 딸을 위한 배려였다. 나는 그런 엄마가 고마워 엄마의 툭 튀어나온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아이고 이렇게 고생하고 살아도 배는 나오네?"

"살 빼야 하는데 잘 안 빠진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살거나 근처에서 살면 좋겠다, 그렇지?"

"현실적으론 불가능 하니... 니는 이제 완전 서울 사람 아니가. 어서 니도 니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데. 니 가정이 생기면 달라질 거다."

"내 가정이라..."

엄마는 지난 통화에서 내가 내 가족을 만들기 전까지 엄마이기도 하지만 언니도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엄마는 엄마이자 나의 자매다. 나는 엄마 옆에서 손을 만지작 거리다 잠이 들었다.


명절 덕분에 오랜만에 부산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언제부턴가 일 년에 3~4번 정도 명절에만 부산을 오는 것 같다. 이번 부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부산시립미술관 공연이었다. 현대 무용의 큰 별인 안은미 선생님과 전방위 예술가 백현진 씨,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 김오키 씨의 앙상블이었다. 백현진 X 김오키 조합은 일 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의 아름답고 따스한 손길과 움직임이 더해지니 마치 반짝이는 마법의 별가루 한 줌이 우리 주변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런 사운드 장치 없이 생목소리로 소리 지르는 백현진, 그에 맞춰 자유롭게 연주하는 김오키,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손키스를 보내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빙그르르 미술관 안을 달리는 안은미 선생님. 이 모습은 마치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을 오마주 한 듯 자유로웠다. 그리고 손을 잡고 달리는 어린이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너무 재밌어!!!"

공연이 끝나고 바닥에 떨어진 반짝이는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연수란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유치원 가방을 멘 작은 아이가 반짝이는 종이를 내 머리 위에 뿌려주었다.

"언니! 많이 모아야 해! 많이 많이! 그래야 더 예뻐!"

나는 얼떨결에 연수와 함께 5분 정도 반짝이 속을 구르고 뛰고 집어던지며 깔깔깔 웃음을 지었다.

"아! 너무 재밌어, 오늘 너무 재밌어!"

연수는 계속 박수를 쳤다.

"연수야! 언니도 너무너무 재밌어! 언니한테 반짝이를 뿌려줘서 고마워."

단전부터 따스함이 차오른다. 나의 유년엔 이렇게 신비로운 경험은 없었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감정은 손끝을 통해 연수에게로 이어진다. 또한 이 따스함과 반짝임은 내 유년 속 기억에 오로라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덧칠돼 모조품일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거면 됐다. 실제 내 기억엔 없어도 조금 위장된 어여쁜 기억을 품고 살 수 있는 것. 그 덕분에 오늘 하루 별빛 한 줌이 내 기억에 흩뿌려졌다는 것이. 오늘 하루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는 것.

사랑과 따스함은 나눌수록, 닿을수록 돌고 돌고 전파된다. 오늘 연수와 내가 닿았듯, 안은미 선생님의 춤사위가 우리들에게 축복을 내렸듯. 그렇게 우리의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로 생명을 조금씩 이어간다.

집으로 돌아가 나는 엄마 아빠에게 이 경험을 말로 나눠주었다. 내 머리카락 위와 가방에는 아직 반짝이 종이가 남아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에 반짝이 종이를 쥐어주며 말했다.

"오늘 정말 따뜻하고 기분 좋은 선명한 경험을 했어. 엄마도 있었으면 정말 좋아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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