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와 인생 /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에 대하여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때였다.
칠판의 글자들이, 우주가 팽창하듯이 멀리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칠판에 적힌 내용 모두가 내 이해 범위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력 범위 안에는 있었는데 ‘안녕’ 하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린 것이다. 그해 겨울에 나는 안과에 들렀고, 시력이 적힌 작은 쪽지를 받아들고 안경점을 향했다. 인간을 나누는 하나의 작은 구분-안경을 썼는가 안 썼는가-에 의해, 나는 이쪽 인간에서 저쪽 인간이 되었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번엔 가까운 세계가 반란을 일으켰다.
광고 브리프를 읽으려는데 초점이 영 안 맞는 것이었다. 흔한말로 ‘노안’이라는 부르는 상태의 도래는 질이 다른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먼 세계는 멀다는 이유로 ‘안 보이는 상태’가 큰 좌절 없이 용인됐다. 가까운 것이 잘 보이고 먼 것이 잘 안보이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시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한계가 조금 다가오거나 뒷걸음질쳐도 근본을 흔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까운 것이 잘 안보인다는 건, 내가 그 자연스러운 법칙에서마저 제외됐다는 뜻 같았다.
젊은 날, 바깥으로 멀어지려는 우주를 만나고 이제, 가까운 곳에서 흩어지려는 세상을 맞닥뜨린 나는 그 둘 사이에서 ‘본다’를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어느 안경 브랜드의 광고가 보여주듯 ‘작은 세계’를 본다는 것을 생각한다. (광고는 설거지용 스펀지, 볼펜 등을 현미경의차원에서 보여주고 있다)
모든 제품은 돋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러면 돋보기의 역할을 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소비자를 대신해서 ‘먼저 돋보는’ 작업이 광고장이들의 본업이다. 보통 사람의 눈엔 작아서 안 보이는 것들, 하찮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굴하고 선보이는 것이 광고장이들의 일인 것이다. 세상의 많은 브랜드를 서로 다르게 특징짓는 것은, 그것 하나로만 보면 하찮지만 모여서 무늬와 결을 만드는 작은 것들이다. 때문에 광고의 첫 걸음이라 할 ‘돋보는 작업’을 잘 하려면 반드시 주의 깊게, 애정을 가지고 제품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돋보게 된 것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우리가 접하는 광고들이다. 광고를 통해 새삼 ‘돋보이게된’ 것들이 원래는 작아서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것들이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비슷하다.
서로를 대충 보아서는 사랑할수 없다. 친해지다는 것,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주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일상생활’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겉모습 속에는 자기만의 사연들이 있다. 사적인 아픔과 고뇌와 불안이 있고, 어떤 역사적 성취보다도 행복감을 주는 사적인 성취와 보람들이 있다. 진정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 작고 소중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사이에 나는 다만 스며들 줄 알아야 한다. 한창 프랑스 자수를 맛들여 밤낮으로 바늘운전에 여념이 없는 아내의 작업을 보아도, 상대방의 작은 것들을 다치지 않으며 조화를 이루는 일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바늘은 천을 꿰뚫지 않는다. 씨줄과 날줄의 사이, 공간을 찌른다. 찌르되(刺) 허공을 찌르는 것이니 찌른다 할 수 없고, 오히려 실들 사이를 왕래한다 해야 옳을 것이다. 관심 없는 눈으로 보기에는 천의 아무 곳이나 자르고 찌를 것 같이 함부로 드나드는 바늘이,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실을 다치지 않고 다만 살짝 옆으로 밀어내면서 섞이고 있는 것이다. 그 작은 씨줄과 날줄 사이를, 상대방이 가지고 있던 작지만 소중한 감정의 기록들을 다치지 않고 그 사이를 왕래하는 몸짓은, 마치 사람들이 들어찬 광장이나 버스, 지하철 안에서, 최대한 몸을 움츠려 제 갈 길을 찾아 나가는 조심스러운 행동과 같다.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어떤 브랜드는 사랑을 받고 어떤 브랜드는 그러지 못 할까?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 쏟는 정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크게 다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가 작은 인간이 되어 ‘당신’을 이루는 작은 것들 사이를 조용히 오갈 때 가능할 것이다.
작은 것들. 그것들은 쉽게 눈에 띄진 않지만 ‘좌우하는 힘’을 가졌다.
이 글은 [월간에세이] 2015년 10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