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끼인 엄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혬 Nov 30. 2021

나는야 끼인 엄마1

MZ세대 워킹맘, 일도 하고 싶고 육아도 하고 싶어!

"아 무언가 꽉 끼었다!!!!"


이 글은 어느 날엔가 워킹맘 생을 3년 꽉 채운 내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서 시작된다. 

나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해 게시판에 붙여보는 작은 쪽지 같은 것이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기본적인 정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밀레니얼 세대이자 30대 평범한 직장인 여성이다.

본캐는 일터와 육아 사이에서 꽉 끼인 워킹맘이요, 부캐는 한창 일꾼이라 불리우는 중간다리 7년차 직장인이다. 물론 이 두 자아는 매순간 순위 경쟁 중이기도 하다. 일터에서는 자기 할 말은 하는 90년대생 신입 사원들에게 치이고, 육아현장에서는 밤을 새며 반찬과 교구를 만들어 내는 열정 주부들에게 치이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나는 처음 내 나이대의 자유로운 여성답게 결혼&엄마가 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질풍노도의 임신기를 겪고, 엄마가 되고 나서도 나의 혼돈은 계속 되었다. 그것은 내가 가족 내에서도 남녀 구분없이 충분한 관심과 지지를 받았던 밀레니얼 MZ세대로서 성장했기 때문이고, 사회 속에서 자아실현의 욕구가 컸던 적극적인 20대 여성이었기에,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불리는 삶은 상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내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연애와 적성에 딱 맞는 직업 찾기였다. 당연히 여기서 결혼이란 단어는 없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밌게 연애를 할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딱 맞는 직업을 갖고 재밌게 살아갈지만 가득했다. 


30대가 되어서도 자아 찾기와 색다른 역량 개발이 나의 핵심 주제였다. 긴 취업준비의 터널을 뚫고 입성한 일터에서는 무언가 생각과는 다른 사회생활에 헛헛함을 느껴 일터 밖에서 열심히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각종 모임에 클래스에.. 다양한 퇴근 후 활동에 재미를 느끼던 참이었다. 서른을 맞이 한다며 친구랑 인도로 떠날 정도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가 보장되던 삶이었다.


그런 내게 3년 차에 급작스럽게 진행된 결혼과 계획되지 않았던 임신은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적성 찾기로 오래 방황했던 20대를 후회하며, 내 30대에는 빠릿빠릿하게 팍팍 진도 빼고 살아낸다고 다짐했던 진도 중에 결혼도 있었으나 10순위 정도였고(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2순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더더군다나 임신이란건 없었다. 이런 내게 결혼한지 두달만에 생긴 아이는 며느리라는 역할도 버거워하던 내게 같은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위기를 맞이한다고 좌절하기만 하면 앞으로 나아갈수 없는 법. 30대 초반에 시작된 엄마 인생은 1년 꽉 채운 육아휴직으로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던 것 같다. 친구 그룹 중에 가장 먼저 아이를 낳으면서 따라할만한 또래 롤모델과 꿈꿨던 엄마상은 없었지만, 문센에서 만난 엄마들, 어린이집 모임 등을 통해 접하는 요즘 엄마들을 보며 어떠한 이상적인 엄마의 기준을 성립해 나갔고 그걸 시도해볼 여력과 시간도 있는 시기였다. 물론 나의 어린시절을 반추해보면서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야겠지만 우리엄마는 워킹맘 1세대였고 나의 어린시절은 고모가 책임져 주어 그런지 보육시기에 일하는 엄마로써 어떻게 살아야할지 도통 기준도 방향도 없이 복직을 해야했다.


공무원이자 바른생활 여인인 언니의 완벽 육아 스타일도 있지만 무언가 나의 삶의 방향에는 맞지 않아서 따라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자주 접하는 인스타 육아맘들도(진상도 알수 없고..) 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들은 커피도 마시고 집도 깨끗하고 이유식도 팍팍 삼시세끼 새걸로 만드는데 (심지어 물건도 팔아서 수익창출을 하는데!!) 나는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못했고 아이는 수시로 아파서 병원에 들락거렸다. 하지만 이 시기를 겪으며 아이와는 끈끈한 애착을 만들었고, 육아에 소극적이었던 내가 00 애미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뿐인 나의 아들은 이 죽일 놈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껌딱지처럼 내 몸에 붙어 있었고(아기띠를 옷처럼!) 그에 맞는 끈끈한 애착과 애정을 상호 형성했던것 같다.


하지만 나는야 사기업의 일꾼. 육아휴직은 1년 이상을 넘을 수 없기에 (최근에 2년이 되었다 오예!) 갓 돌을 넘은 아이를 떼어놓고 직장으로 돌아가며 나는 내 분신과도 같은 아이와 떨어지며 정신적 분리불안에 시달렸다. 이것과 병행하며 시작된 출근-퇴근-육아의 꽉 짜인 타임라인 펀치에 맞아 초반에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물론 은퇴한 친정 엄마의 조력이 있었으나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던 남편 대신 퇴근 후 저녁 육아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일찍 하원하던 예민한 아드님 덕에 어머니의 건강 상의 이후로 몇달 안되어 등원까지 맞게 되었다. 겉은 튼실하나 속은 유리같은 아들이 수시로 열감기, 수족구, 편도염 등을 달고 살아서 일을 하면서 어린이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내며 속이 터져가는 상황을 수없이 맞이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한명의 일꾼이 복직하였으니 회사에서는 주말 출근 업무를 신속히 배정했다. 야속한 마음도 들었지만 쉬는 동안 회사는 급변해 있었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여서 더 열심히 일했다. 그나마 남편과는 같은 상황의 직장인이어서 주말에는 남편이 아이를 봤고 난 업무를 보았다. 빨래와 설거지는 건조기&식세기 이모님이 해주셨고, 청소는 일주일에 한두번 치우면 감사한 수준이었다. 전집을 사며 열을 올렸던 책육아와 신기한 템으로 발달 단계에 맞춰 자극을 주던 일은 옛 일이요, 그저 아이의 발달 속도를 놀라워하며 따라가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돌이켜 보건데 복직후 2년간은 정신없이 살았다가 딱 맞는 표현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