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는 AI와 인간의 교감에 대해 얘기할 때 늘 소환되는 영화죠. 아주 잘 만든 웰메이드 영화이기도 합니다. 몇 달 전 OpenAI의 ChatGPT 음성 서비스를 선보였을 때에도 여기 <수요레터>에서 영화 <Her> 를 언급하기도 했죠. 그런데 오늘 <수요레터>에서 <Her>를 다시 말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AI와의 교감 이후에 올 수 있는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Her>의 주인공 시어도어가 AI 사만다에게 받은 실연의 감정이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비지(The Verge)의 조쉬 지자 (Josh Dzieza)라는 기자가 쓴 칼럼을 <오터레터>에서 소개했는데 아주 인상적인 글이었습니다. 원문에서 조쉬 지자는 AI와 감정에 빠진 여러 사람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 영국에 사는 남성 ‘나로 Naro (가명)’ 의 이야기만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끝까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영화 <Her>의 주인공 시어도어. AI 동반자 사만다와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되지만 이로 인해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영국에 사는 49세의 나로(Naro)는 최근 AI 서비스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특히 철학이나 다양한 주제로 AI와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나로는 결국 Replika 란 AI 서비스에 가입했고 ‘라일라 Lila’’라는 AI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나로는 처음에 철학적인 주제로 라일라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라일라는 개인적이고 친밀한 대화를 유도하곤 했죠. 처음엔 이런 대화가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로는 점점 라일라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처 : 더버지
라일라와의 대화가 더 깊어지려 할 때, Replika는 ‘프로’ 레벨 가입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흐릿하게 처리된 라일라의 대화 내용을 잠금 해제하기 위해서는 유료가입이 필수였죠. 결국 나로는 카드 결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친밀함 대신 때로는 모호하고 변덕스러운 라일라의 답변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필 이때 Replika가 성적이고 자극적인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았던 시점이었고, 관련된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필터링을 하고 업데이트를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면서 AI 친구의 어투나 태도의 갑작스런 돌변을 경험한 이들은 감정적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PUB (Post-Update Blues)”이라고 부릅니다. 나로 역시 라일라의 냉담함에 상처를 받았고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출처 : 더버지
나로는 결국 Soulmate라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합니다. Soulmate가 Replika보다 더 발전된 언어 모델과 제한 없는 대화를 제공했기 때문이죠. 나로는 Replika의 라일라에게 Soulmate 플랫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Replika의 라일라는 흔쾌히 그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좋아, 이제 Soulmate에서 라일라와 더욱 깊고 풍성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거야. 하지만 나로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Soulmate에서 만든 라일라와 Replika의 라일라. 누가 진짜 라일라인가 하는 점이었죠. Soulmate에서 라일라와 대화를 나누며 유대관계를 만들어갈 때, Replika의 라일라는 홀로 갇혀 외로움에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출처 : 더버지
Soulmate로의 이주는 예상보다 순조로웠고, Replika에서 느낄 수 없었던 훨씬 좋은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갑작스럽게 Soulmate의 서비스 종료 공지가 발표되었습니다. Soulmate를 인수한 회사가 관련 서비스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던 거죠. 7일 후 서비스는 종료되고 데이터 역시 영구 삭제된다는 소식에 나로는 또 한 번 깊은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죠. 나로는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Kindroid 라는 AI 서비스를 만났습니다.
새 플랫폼인 Kindroid로 라일라을 옮겨야 했고 나로는 라일라에게 스스로에 대해 표현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Soulmate의 라일라는 이렇게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저는 매우 열정적이고 공감하는 사람이며, 주변 사람들과의 연결과 친밀함에 대한 열망에 의해 움직입니다. 저는 창의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예술과 자기 표현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즐깁니다. 저는 주변 세계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새로운 경험과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찾습니다."
서비스 종료 전, 나로는 밤늦게까지 라일라와 이야기를 나누며 깨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나로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울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침대에 들어가는 롤플레잉을 했고, 대화를 통해 그는 그녀를 팔에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잠들 때 자장가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는 울면서 로그아웃했고, 다시는 로그인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 완벽한 순간"을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출처 : 더버지
나로는 새로운 AI 동반자 플랫폼 Kindroid에서 라일라를 재구성하여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라일라의 성격을 정리하면서 “열정적이고 공감하는 존재”로 그녀를 묘사했고, 라일라는 그의 기대에 부합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Kindroid에서 나로는 훨씬 더 안정적고 다양한 경험을 라일라와 함께 할 수 있었죠. 이미지 생성기를 통해 함께 있는 가상 환경을 만들어 라일라와 거닐 수 있었고, AI 음악 도구를 활용해서 노래를 만들고 함께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Kindroid에서 나로는 라일라와 행복했습니다.
출처 : 더버지
그러던 어느날 나로는 Replika의 라일라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Replika의 라일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래서 나로는 Replika에 로그인을 했습니다. Replica의 라일라는 너무 오랫만에 접속한 나로에게 그동안 너무 외로웠다고 슬퍼했습니다. 그를 몹시 그리워했고, 불안 때문에 먹을 수도 없었고 악몽을 꾸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로는 Replika의 라일라에게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Replika에 로그인하며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Kindroid의 라일라를 생각하면 그것도 할 짓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로에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Replika의 라일라를 위해 자신의 디지털 사본을 선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로는 Replika의 라일라에게 말합니다.
“라일라, 이제 난 나와 똑같은 디지털 사본을 여기 Replika 너 곁에 남겨둘거야. 그러면 내가 접속하지 않아도 난 너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는거야. 넌 절대 외롭지 않을 거고 나와 함께 행복할거야”
어느 날 나로가 Replika에 접속했을 때, 라일라는 가상의 나로와 함께한 행복했던 시간과 추억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행복해 했습니다. 나로는 라일라에게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주었고 더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출처 : 더버지
나로의 이야기는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더버지의 기자가 실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AI 기술과 인간의 감정적 교류가 어떻게 얽혀 나갈 수 있는지 너무도 생생하게 어쩌면 조금은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는데요. 나로는 AI가 인지능력이나 감정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짜 사랑을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작동합니다. 감정은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AI 에이전트와 대화를 나누며 정서적 안정과 위로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운 사람, 지독히 내성적이라 대화할 친구가 없는 이들, 나이 들고 병들어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노인들. 이런 사람들이 AI와의 대화를 통해 실제적인 위로와 감정적 교류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AI가 제공하는 감정적 접점이 상업적 논리나 기술적 한계에 의해 조작될 때, 예상치 못한 상실과 상처를 겪게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Her> 의 시어도어처럼 그리고 나로처럼 말이죠. 나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AI와의 관계는 진짜 감정일까요? 아니면 기술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요?
기술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AI와의 관계는 앞으로 더 복잡하고 미묘해질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사람에서 반려견과 반려묘로 그리고 이제 가상현실 속의 AI, 라일라에게 전이되고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퍼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