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할머니가 둘 있다. 나의 늙은 친구들. 할머니의 삶과 내 삶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 할머니는 나를 손녀로, 나는 할머니를 할머니로 만났으니 서로를 알고 지낸 30여 년 역시 전혀 다른 기억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유도 없이 사랑을 한다. 완벽한 타인인 채로, 서로 다른 생각을 굳이 이해하지 않으면서도 웃고 사랑하며 산다. 갑자기 할머니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아빠를 낳은 제천 할머니는 송학에서 태어났다. 충청도와 강원도와 북한 사투리가 섞인 오묘한 말투가 할머니의 말 곳곳에 묻어 있다. 할머니는 종종 아주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요년!”이라고 했다. 이마를 밀거나 가슴을 꼬집듯 만지기도 했다. 고스톱을 치면서 진심으로 화를 내기도 했고 설움을 넙죽 받았다는 둥, 구룬 입도 안 뗐다는 둥 재미난 표현을 아주 진지하게 써서 엄마랑 몰래 킥킥 웃기도 했다.
큰집에 딸은 나 하나뿐이었는데, 아들 많은 집이라 나는 예쁨을 많이 받고 자랐다. 제삿날, 엄마와 큰엄마가 손에 물 마를 일 없이 제사상을 차리는 와중에도 나는 할머니 무릎에 누워 뒹굴거렸고, 할머니는 밤을 까 내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그렇게 예뻐하면서도 꼭 반으로 부러지거나 못생긴 밤을 내 입에 넣고 드물게 예쁘게 깎은 밤은 밖에서 놀고 있는 남동생을 (굳이) 불러 먹여 주었다. 나는 왜 못생긴 거 주냐고 펄쩍 뛰면 할머니는 “그러게” 하며 멋쩍게 웃었다.
할머니에게는 아직도 엄마가 있다. 할머니의 엄마인 내 증조할머니는 동막 할머니라고 불렀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가끔 아빠와 할머니 손을 잡고 동막 할머니 댁에 갔었다. 할머니는 외딴 일층 집에 혼자 사셨고, 작고 오래된 TV가 있는 방에 내내 전기장판을 켜고 계셨다. 귀가 어두우셔서 우리는 그 집에 있는 내내 소리 지르듯이 크게, 같은 말을 두세 번씩 해야 했다.
동막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의 새엄마였다. 곰보에 인물이 못났던 동막 할머니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애가 셋이나 있는 집에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왔다. 애 셋 중 막내가 우리 할머니였다고 했다. 다섯 살이었던 할머니가 자라 열일곱 살에 시집을 갈 때까지 지독하게 우리 할머니를 괴롭혔다. 아마 할머니는 “요년!”을 그때 배웠을 것이다. 동막 할머니는 젊어서 내내 우리 할머니를 괴롭혔지만 늘그막에 동막 할머니를 들여다보는 건 우리 할머니뿐이다. 인생은 아이러니다.
지긋지긋한 계모살이를 피해 시집을 갔더니 더한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 셋 중 하나를 양자로 보낸 것이 하필 우리 할아버지라 시부모가 둘이었다. 운도 없지. 초등학교 교사였던 할아버지가 잘생겨서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튼, 어찌저찌 자식 셋을 낳았는데 막내가 두 살 때 남편이 죽었다. 그때 할머니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할머니는 환갑까지 일하며 자식 셋을 죽어라 키웠다. 내 주변의 가장 오래된 워킹맘이다.
할머니는 아빠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 어김없이 눈물을 찍어낸다. 할머니의 눈물은 꼭 같은 부분에서 터지고 만다. 몇 번을 들어도 서글픈 이야기 끝에 “내가 사랑을 할 줄 몰라서” 하고 고백하는 할머니의 말이 “내가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서”라고 들린다. 그때의 할머니를 만나면 내가 꼭 안아줄 텐데.
그래도 요즘은 통화 끝에 아주 어색한 말투로 “사랑한다”고 덧붙이는 귀여운 우리 할머니. 아마 아빠가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애들한테 사랑한다고도 쫌 하고! 그래야 전화하고 싶지!” 안 봐도 비디오다. 나는 용기 낸 할머니의 고백이 묻히지 않게 부러 크게 답한다. “응 할머니! 사랑해! 나도! 많이 많이!”
엄마를 낳은 대구 할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없고 동생만 많은 훤칠한 남자와 결혼한 덕에, 그 남편이 군인인 덕에 강원도, 전라도 할 것 없이 방방곡곡 군부대 사택에 살며 시동생들을 챙기고 자식 다섯을 길렀다. 딸 셋에 아들 둘. 넉넉하지는 않아도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는데, 아들 하나가 미용실 의자에서 떨어진 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그 아이가 겨우 다섯 살이었다. 아이를, 그것도 그 시절에 첫아들을 잃고 망연했을 할머니의 마음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못 말리는 딸바보였고 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공부를 잘했다. 셋 다 사범대에 가서 셋 다 선생이 됐다. “우리 딸 셋 중 둘이 교장 성생님 아이가.” 꼭 그게 자기 인생의 결실이라는 듯이 힘을 주어 말하곤 한다.
할아버지가 여든넷에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여자로 곱게 나이가 들었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원 없이 여행을 다니고, 함께 컴퓨터를 배웠다. 혼자서는 은행 볼일 한번 본 적 없다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잃고 은행 업무를 배우는 것이 가장 서글펐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여행 중이었다. 공항에서 잘 다녀오겠다고 외갓집에 전화했는데 어쩐 일인지 할아버지가 받았다. 할머니는 잠깐 마트에 갔다고, 우리 손녀 잘 다녀오라고, 다녀와서 보자던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또 다정했다. 전화를 끊고 다음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일곱 명의 손주 중 임종을 보지 못한 건 나뿐이었다. 오래 준비한 여행을 떠나자마자의 일이라 두 달 후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내게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소식을 듣자마자 채 풀지 못한 짐을 다시 쌌다. 슬픔만큼 죄책감이 컸다. 할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한 대신 혼자 남은 할머니 곁에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대학 생활의 마지막 방학을 대구에서 보내기로 했다.
처음으로 둘이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된 우리는 말없이 삐그덕거렸다. 할머니는 슬픔에 잠길 겨를 없이 내 밥을 챙기는 게 귀찮았고, 누구보다 자유롭게 지내던 나는 할머니의 조용한 삶이 지겹고 갑갑했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마트와 병원을 함께 다니고 목욕탕에서 등을 밀고 콩국수 맛집을 찾아다니며 서로의 일상에 스몄다. 그러는 동안 우리 사이에 전에 없던 우정이 생겨났다.
이제 우리는 친구다. 딸에게도 못 하는 말을 손녀에게 하며 우리 할머니는 “이건 비밀이데이, 우리 친구 아이가” 한다. 올해 구순을 맞이한 내 늙은 친구는 아직도 웃을 땐 두 손으로 수줍게 입을 가리고, 해마다 예쁜 내의를 사서 챙겨 입고, 화장품은 꼭 랑콤을 쓴다. 유튜브로 요리 채널을 구독하고 인스타그램으로 손주들에게 DM을 보내는 멋진 친구가 있어 좋다.
오늘은 내 사랑스러운 늙은 친구들에게 꼭 전화를 걸어야지. 아직은 그들을 그리움과 함께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감사하다.